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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구의역·이천화재도 처벌 못하는 ‘중대재해법’

등록 2020-12-29 21:11수정 2020-12-30 02:41

누더기 된 정부안에 유족들 분노
“같은 죽음이 수십년 계속되는데…”

‘2명 이상 사망’ 기준으로 결론 땐
김용균 참사 등 처벌 다 빠져나가
양경수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가운데)이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 단식 돌입 기자회견에서 단식을 시작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양경수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가운데)이 2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신임 민주노총 위원장 단식 돌입 기자회견에서 단식을 시작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안은 법의 취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법의 실효성을 완전히 빼버린, 껍데기만 남은 안이다.”(고 이한빛 피디 아버지 이용관씨)

정부가 책임 범위와 처벌 대상을 대폭 축소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스무날 가까이 곡기를 끊고 법 제정을 촉구해온 산업재해 희생자 유가족들은 분노했다. 김용균재단 이사장 김미숙씨는 2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정의당 의원총회에 참석해 “수십년 이런 죽음이 계속 있고 이제 막자고 하는데 정부에서 또 죽이겠다고 한다”고 개탄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대표로 한 법학계 인사 92명도 정부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정부안대로 국회를 통과한다면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 불렸던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논의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오후 열린 더불어민주당 비공개 의원총회에서도 정부안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고 한다. 민주당 관계자는 “발언한 의원들 다수 의견은 ‘정부안이 너무 후퇴한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고, 특히 중대재해 개념을 너무 좁혀서 법의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많았다”고 전했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법사위원회에서는 정부안을 기준으로 논의하지 말고 의원들의 우려를 다 반영해 심사해달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자 2명 이상’?…‘구의역’도 처벌 못 해

정부안은 중대재해의 ‘정의’부터 갈팡질팡하고 있다. 정부는 중대재해법 적용 기준을 ‘사망자 1명 이상’ 또는 ‘동일한 원인으로 또는 동시에 2명 이상 사망’으로 검토하고 있다. 최종안이 후자로 결론 나면 혼자 일하다 숨진 태안화력의 김용균씨,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작업을 하다 숨진 김군 사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김미숙씨가 “용균이는 혼자 일했고, 많은 죽음이 거의 혼자 일하다가 일어난다. 혼자 일하다 벌어지는 재해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죽음을 막지 못한다”고 우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부는 급성중독 사고는 ‘5명 이상 동시’에 피해자가 있을 때 중대재해로 규정하는 안도 제시했다. 이렇게 되면 2016년 삼성과 엘지 사외하청 노동자들의 메탄올 중독 사고(6명 이상) 등의 사례는 ‘동시가 아니라는 이유’로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38명 숨진 이천 화재 참사도 처벌 유예 가능성

정부는 법 적용 유예 대상 사업장도 대폭 늘렸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안에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법 적용을 4년 유예하자는 부칙이 있었는데, 정부는 더 나아가 ‘50인 이상~100명 미만 사업장’은 2년을 유예하자는 안을 추가했다. 김종철 정의당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중대재해의 85%가 일어나는데 이런 사업장에 적용을 4년 유예하는 것도 모자라 50~99인 사업장도 2년 유예를 가져왔다”며 “원청 책임도 약화, 처벌도 완화, 징벌적 손해배상도 약화다. 중대재해기업 ‘처벌’법을 만들자고 했더니 중대재해기업 ‘보호’법을 가져온 셈”이라고 날을 세웠다.

정부안이 입법되면 38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 같은 사례가 2년 이내에 다시 발생했을 때 중대재해법의 적용을 피하게 된다. 당시 시공사였던 ㈜건우는 임직원이 62명인 중소기업으로, 50인 이상 100인 미만 기업이다. 지적장애인으로 재활용업체에서 일하던 김재순(26)씨가 지난 5월 파쇄기에 끼여 숨졌던 사례는 4년간 중대재해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김씨가 일했던 회사는 13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영세사업장이었다.

임대한 크레인에서 사고 나도 책임자 처벌 안 돼

정부는 사업주나 법인, 기관이 제3자한테 임대·용역을 준 경우 안전 보건 책임을 지게 하는 부분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냈다. 사업주 등이 ‘시설, 설비 등을 소유하거나 그 장소를 관리하는 책임이 있는 경우’에만 한해 처벌하도록 단서조항을 두자는 제안이다.

이와 관련해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건설 현장은 기계를 임대해 작업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임대를 이유로 원청이 처벌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타워크레인 등 건설기계 임대 세 가지만 원청 책임을 인정한다. 정부안은 산안법 기준보다 좁다. 덤프, 지게차, 굴삭기 임대 등은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는 “발주만으로 안전·보건 조치 의무를 부담하는 것은 과잉이므로 발주는 제외”하자는 의견을 냈다. 고용노동부 의견대로라면, 앞으로 발주처가 무리한 공기 단축 등 안전 의무를 위반하고 그로 인해 중대한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 책임을 묻기 어려울 수 있다.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는 이날 이천 화재 참사의 주요 원인이 ‘발주처의 공기 단축 지시’라는 점을 지적했다.

인과추정 조항 삭제도

정부안은 또 인과관계 추정 조항도 아예 삭제했다. 공무원 처벌 조항도 ‘형법상 직무유기’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하지만 이날 국회에 의견서를 낸 법학자들은 “안전범죄에서는 기업이 여러 정보를 독점하고 있고, 결과를 초래한 직접적인 행위보다 그 구조적인 배경을 제공한 행위가 더 큰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기업의 안전범죄 등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인과관계 추정 조항은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미 환경범죄 관련 법률에서 ‘상당한 개연성’을 전제로 인과관계 추정 조항을 두고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노지원 박준용 최원형 정환봉 기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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