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10일 오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철회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삭발한 뒤 발언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자유한국당 박인숙 의원이 11일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에 항의하며 삭발했다. 이언주(무소속) 의원의 전격 삭발이 화제가 된 다음날이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국회 본청 계단 앞으로 나와 삭발한 박 의원을 안아주며 격려했다. 지난 10일 한국당 거리 규탄 연설회 때는 나경원 원내대표를 향해 “다 삭발합시다! 대표님 우리 머리 다 삭발합시다. 국민이 지금 잠을 못 자고 있는데” 라고 외치는 지지자도 방송 영상을 통해 공개됐다.
의원들의 ‘삭발 투쟁’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당에서는 저항의 표현이라는 입장이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표-중진의원 연석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제도권 내의 저항을 넘어선 저항이 필요한 수순으로 가고 있지 않나 우려한다”며 “저항의 표현으로서 삭발도 존중하는 것이 맞는다”고 말했다. 정진석 의원은 박 의원의 삭발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비록 정치적 행동이라 할지라도, 한 여성 정치인으로 하여금 삭발저항을 하도록 만든 독선과 오기와 비이성 몰상식의 광기(狂氣)정치는 반드시 그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썼다.
자유한국당 좌파독재저지특별위원장을 맡은 김태흠 의원(왼쪽 셋째)을 비롯한 4명의 의원과 지역 위원장이 5월2일 국회 본청 앞에서 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법안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지정의 부당성을 알리는 삭발식을 마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왼쪽부터 이창수 충남도당 위원장, 성일종, 김태흠, 이장우, 윤영석, 박대출 의원.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삭발은 저항을 표현하는 ‘정치적 행동’이지만, 삭발을 둘러싼 정치권 분위기는 엇갈린다. 홍준표 전 한국당 대표가 “아름다운 삭발” “야당 의원들은 이언주 의원의 결기 반만 닮았으면 좋겠다”고 독려하는 반면, 대안정치연대 박지원 의원은 “국회의원이 하지 말아야 할 3대 쇼는 의원직 사퇴, 삭발, 단식”이라며 “머리는 자라고, 굶어죽은 의원 없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그래서일까. 당내에선 황교안, 나경원 대표를 향한 여러가지 정치적 요구가 나오지만, 그 가운데 단식이나 삭발 요구는 크게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한 한국당 의원은 “오죽 답답하면 삭발을 하겠느냐”면서도 “지금처럼 정부가 귀를 막고 있는 정국에서 지도부 삭발이 큰 효용이 있을지 모르겠다”고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전통적으로 주로 노동계에서 투쟁 의지를 다지며 치러져 왔던 삭발식은, 정치권에서는 단식·장외투쟁과 함께 야당이 사용하는 ‘최후의 수단’에 가깝다. 여론을 환기하고 지지층을 결집함으로써 여당에 맞서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이날 삭발식에서 박 의원은 “삭발한다고 하루 아침에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은 ‘밀알’이 되고자 한다”고 밝혔다. 앞서 이언주 의원도 “시민단체와 정치권이 투쟁연횡을 구성하자. 저도 그 ‘밀알’이 되겠으니 국민 여러분께서 함께 싸워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한나라당의 원내부대표인 김충환,이군현,신상진 의원(왼쪽부터)이 2007년 2월26일 사학법 재개정 관철을 위해 국회 로텐더홀에서 삭발을 하고 있다. 사학법 재개정 문제와 관련, 김형오 당시 원내대표는 여야 장로의원 8인 모임에 참석해 “정부·여당이 사학법을 통과시켜 주면 우리도 국회 운영위원장은 물론 로스쿨법 등 여권 법안에 전향적으로 협조할 생각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종찬 선임기자 rhee@hani.co.kr
2013년 11월7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통합진보당이 위헌정당해산 심판청구에 항의하는 회의를 열고 있는 가운데, 황교안 당시 법무장관이 국회 법사위에 참석하기 위해 국회로 들어가고 있다. 김경호 기자
국회에서 삭발식은 지난 5월에도 열렸다.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4당의 공조로 선거법 개정안 등이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되자, 김태흠 등 5명의 한국당 의원이 집단 삭발을 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때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에 항의하며 오병윤 원내대표·김재연 의원 등 통합진보당 의원들이 삭발한 지 5년만의 단체 삭발이었다. 지난 2007년에는 신상진·이군현·김충환 의원 등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원내부대표 3인이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삭발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야당이었다.
물론 여당이 삭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2004년 설훈 민주당 의원은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처리된 데 대해 “조순형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가 정상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저항하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는데, 그에 앞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삭발했다. 이후 설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같은 ‘의원 삭발식’의 기원은 1987년 박찬종 전 의원이 김대중·김영삼 두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단식삭발투쟁에 나선 데서 찾는 이가 많다.
무엇보다 삭발은 여론의 관심을 호소하고 투쟁의 절박함을 국민에게 알리려는 차원이 크다. 노동계를 비롯해 시민단체, 지역대표나 이익단체 등에선 삭발 시위를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최대집 대한의사협회회장은 2018년 선출 뒤 그해 10월, 올해 2월, 6월 세 차례나 삭발했다. 그는 2017년 11월에도 청와대 앞에서 비급여 전면급여화 저지 삭발을 한 바 있다. 수백명 넘게 동시에 삭발한 최대규모의 삭발식도 있다. 지난 1월 경기도 포천시민 1만3000명(집회 쪽 추산)이 광화문 광장에서 연 집회 때는 전철 연장사업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요구하며 단체 삭발식에 응했다. <연합뉴스TV>는 당시 시민 1016명이 삭발식에 동참했다고 보도했다. 정유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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