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쇼 뉴질랜드 녹색당 대표 겸 기후변화장관(마이크 잡은 이)이 지난 15일 수도 웰링턴에 있는 의회 앞에서 ‘기후 행동을 위한 학생 파업’을 위해 모인 학생 2 천여명에게 정부의 환경보호 대책을 설명하고 있다.
지난 15일 오전 10시(현지시각),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 거리에 수업을 거부한 학생 2천여명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의 미래를 위해 파업한다’ ‘어른답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행동하겠다’ 등이 적힌 팻말을 들고 의회까지 행진했다. 세계 100여 나라에서 진행되는 ‘기후 행동을 위한 학생 파업’ 운동이다.
웰링턴 북쪽 의회 앞마당에서 이들을 맞은 건 녹색당 대표이자 기후변화장관인 제임스 쇼(46)였다. 녹색당은 노동당, 뉴질랜드퍼스트당과 함께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쇼 장관은 이날 학생들과 만나 “지난 30년간 정치인들은 기후 변화에 관해 얘기했다. 이젠 대화를 멈추고 행동을 시작할 때”라며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제로 탄소법’의 통과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지구 온도를 1.5도 낮추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끝까지 지지해달라”고 당부했다.
녹색당은 2017년 9월 총선에서 지역구 의석을 한석도 얻지 못했지만 정당득표율 6.27%를 기록해 비례대표 8석을 받았다. 정당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나누는 선거제도 덕분에 전체 의석(120석)의 6%가 배정됐다. 녹색당은 환경보전부, 기후변화부, 여성부 장관 자리도 받았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뉴질랜드에서 핵심 부처를 차지한 것이다. 뉴질랜드 환경보전부는 지난 13일 영화 <반지의 제왕> 촬영지로 유명한 카후랑기 국립공원 보존구역을 6만4000헥타르(약 1억9360만평)까지 확장하는 안을 관철시켰다.
■ “모든 표는 중요하다”
소수정당인 녹색당의 의회 진출은 뉴질랜드가 국민투표를 거쳐 1996년 총선부터 적용한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결과물이다. 그 이전까지는 국회의원 정수가 99석이었지만, 96년 총선부터 120석(지역구 64석, 비례대표 49석, 마오리족 의무할당 7석)으로 늘었다. 현재 뉴질랜드는 전체 의석을 120석으로 고정하지 않고 일부 초과 의석을 인정한다. 초과 의석이 2014년 선거에서 1석, 2017년 선거에선 나오지 않았다.
연동형 비례제 도입 전까지 뉴질랜드는 비례대표 없이 ‘승자독식’ 소선거구제(지역구에서 최다득표자 1명 당선)를 운영하며, 한국처럼 강고한 양당제 체제를 이어왔다. 하지만 1980~90년 급진적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고 노동당, 국민당 정부가 잇따라 정권을 잡으며 복지 축소 기조가 가속화했다. 저소득층 임금이 떨어지며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공공의료·교육·사회보장 정책 예산이 깎였다. 철도·항공·통신·은행·산림·에너지 등의 주요 공기업도 모두 민영화됐다. 이 과정에서 선거제 개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국민 삶에 치명적 영향을 끼치는 주요 정책을 정치권이 일방적으로 추진해도, 이를 제어할 시스템이 약하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된 것이다. 의회 의석이 정당득표율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민심 왜곡 현상’도 주된 이유로 제기됐다. 1978년 총선에서 중도 좌파 성향의 사회신용당은 16.1%를 득표했지만, 의석은 고작 1석을 차지했다. 1981년 선거에서도 사회신용당의 득표율은 20.7%까지 뛰었는데, 의석은 2석에 그쳤다. 반면 거대 양당인 국민당과 노동당의 정당득표율 합계는 77.8%였지만 의석의 97.8%를 채웠다. ‘과다 대표’된 거대 양당에 대한 국민 불신과 지지율 추락도 선거제도 개혁의 촉매제가 됐다.
뉴질랜드 선거제도 개혁 과정의 특이점은 국민에게 직접 의사를 물었다는 점이다. 선거제 개혁 목소리가 커지면서 노동당 정부는 1985년 ‘왕립위원회’를 구성해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연구와 조사를 맡겼다. 왕립위원회는 이듬해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꿀 것 △의석수를 99석에서 120석으로 늘릴 것 △연동형 비례제 도입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 등 세가지를 제안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과 1993년 두차례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92년 국민투표에서 선거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비율은 전체 투표자의 85%로 절대적이었으며, 네가지 대안 중 연동형 비례제를 지지한 비율이 70.5%나 됐다. 93년 국민투표에선 연동형 비례제와 기존 제도만을 선택지로 놓고 의견을 물었다. 연동형 비례제를 지지한 비율은 53.9%였다. 이후 1996년 총선부터 독일식 연동형 비례제 방식으로 의원을 뽑기 시작했다.
뉴질랜드 최초의 난민 출신 의원인 골리즈 가라만(녹색당)은 <한겨레>와 만나 “선거제도 개혁 뒤 정당 투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정책 정당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게 됐다”며 “정당이 이념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관심사, 지지 의견 등을 대변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 “선거제 개혁, 어떤 정부를 원하나에 달려”
2011년 집권당이던 국민당 정부는 ‘연동형 비례제를 재검토할 시점’이라고 선언했다. 국민당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제도로 바꾸려고 “꼼수를 부리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선거제 ‘회귀’ 여부를 놓고 같은 해 11월 치러진 국민투표에서 시민들은 또다시 연동형 비례제를 택했다. 연동형 비례제 유지에 찬성한 비율은 57.77%로 절반을 넘었다. 반대는 42.23%였다. 이 결과를 놓고 전문가들은 △득표율과 의석수 사이의 불비례성 해소 △합의가 강조된 정당정치 △원주민·이민자·여성 등 소수 세력의 정치 대표성 향상 등을 시민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분석한다.
시민단체의 힘도 컸다. 특히 시민단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위한 운동’은 전국을 15개 구역으로 나눈 뒤 광장에서 시민들을 직접 만나 선거제도가 정치와 시민의 삶에 끼칠 영향과 중요성을 일일이 설명했다고 한다. 이 단체에는 20살 대학생부터 은퇴한 낙농업자까지 다양한 세대와 집단이 모였다.
이들이 내건 슬로건은 “모든 표는 중요하다”(Every vote counts)였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위한 운동’의 전국위원회 의장 샘 허거드는 <한겨레>에 “개인의 삶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들은 대체로 전국적 차원에서 결정돼야 하는 것이 많다. 교육·의료·환경 등은 정당을 통해 의견이 표출될 수밖에 없는 주요한 사안들”이라며 “(정당에 대한) 민심의 지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가장 공정한 제도”라고 강조했다.
연동형 비례제가 도입된 뒤 뉴질랜드의 가장 주요한 변화는 이전 정부에서 여러 정치세력이 합의한 주요 정책을 다음 정부에서 지우는 행위가 거의 없어진 것이라고 한다. 뉴질랜드 선거제 개혁 과정을 수십년간 연구해온 잭 바울스 뉴질랜드 빅토리아대 교수는 “선거제도를 바꾼 뒤 전임 정권이 결정한 정책을 현 정권이 정반대로 뒤집는 경우가 적어졌다”며 “정책을 수립할 때 다양한 목소리가 영향을 끼칠 통로가 많아졌다는 뜻”이라고 연동형 비례제의 강점을 소개했다.
거대 양당이 ‘과점’하던 때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부의 주요 정책을 뒤엎는 경우가 많았는데, 연동형 비례제로 의회 구성이 다양화되고 정책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통로’가 많아지면서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선거제도 개편을 시도하는 한국 정치권을 향해 “어떤 정부를 원하느냐가 관건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강한 정부, 여론과 관계없이 밀어붙일 정부를 원한다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이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정부가 국민이 원하는 이야기를 듣고, 조율하고, 최대한 그것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하길 원한다면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바람직하다”고 했다.
특히 그는 한국 정치권에서 제기되는 ‘대통령제와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맞지 않는다’는 우려에 대해 “대통령이 있으면서 비례대표제로 운영하는 나라가 많다. (대통령제와 연동형 비례제가) 조응이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국민의 다양한 의사가 의회와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는 제도가 무엇인지를 우선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선거제도 개편 논의의 핵심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웰링턴/김미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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