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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예전 목숨 건 투쟁부터 요즘 ‘무늬만 단식’까지

등록 2019-02-02 13:50수정 2019-02-11 10:01

[토요판] 뉴스분석
단식의 정치학

1983년 김영삼의 23일간 단식
전두환 독재에 균열낸 쾌거
1990년 김대중의 단식 투쟁도
지방자치제 앞당기는 계기 돼

민주화 이후엔 비장함보다
눈길 끄는 투쟁방식으로 변화
이익추구·소신·충성형 등 다양
때로는 조롱거리 전락하기도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 특보로 선거 백서에 이름이 올랐던 조해주 선거관리위원의 임명에 항의해 자유한국당은 지난 24일부터 국회 본청 계단 아래 이순신 동상 옆에서 소속 의원들이 당번을 정해 이른바 ‘릴레이 단식’을 벌였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진 단식조의 단식 시간은 불과 5시간30분이었다. 지난 30일 오전 당번인 원유철(왼쪽부터), 김무성, 강석호, 윤상현, 정진석, 유기준 등 중진의원들이 릴레이 농성하고 있는 모습.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 특보로 선거 백서에 이름이 올랐던 조해주 선거관리위원의 임명에 항의해 자유한국당은 지난 24일부터 국회 본청 계단 아래 이순신 동상 옆에서 소속 의원들이 당번을 정해 이른바 ‘릴레이 단식’을 벌였다. 오전과 오후로 나눠진 단식조의 단식 시간은 불과 5시간30분이었다. 지난 30일 오전 당번인 원유철(왼쪽부터), 김무성, 강석호, 윤상현, 정진석, 유기준 등 중진의원들이 릴레이 농성하고 있는 모습.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스스로 음식을 거부하는 단식은 벼랑끝 투쟁의 하나다. 그만큼 단식 현장에는 비장하고 숭고한 분위기가 감돈다. 그러나, 투쟁 당사자들과 달리 대중들은 예전만큼 단식 투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최후의 수단이 너무 쉽게 또 자주 사용된 탓이 크다. 우리 정치사에서 있었던 단식 사례를 살펴본다.

지난 30일 국회 본관 정문 안쪽의 본회의장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복도. 이순신 동상 옆 벽 앞에 원유철, 김무성, 강석호, 윤상현, 정진석, 유기준 의원 등 자유한국당 의원 6명이 일렬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원유철, 정진석 의원만 넥타이를 매지 않은 약간 편한 차림이었을 뿐 나머지는 대부분 외투까지 갖춰 입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들 앞에 ‘캠프인사 선관위원 부정선거 획책이다’ 등이 쓰인 손팻말과 ‘좌파 독재 저지 및 초권력 규탄’이라고 적힌 입간판이 없더라면 야당의 중진 의원들이 여기서 뭐 하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깔끔한 입성이었다. 이들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소속된 의원들로, 이날 오전의 릴레이 단식 당번이었다. 오후에는 예정된 대로 이주영, 김성태, 황영철 의원 등 국방위 소속 의원들로 교체됐다.

자유한국당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 특보로 선거 백서에 이름이 올랐던 조해주 선거관리위원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한 데 항의해 지난 24일부터 소속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릴레이 단식에 들어갔다. 1일에 끝난 릴레이 단식은 상임위 별로 조를 나누어 오전(09:00~14:30)과 오후(14:30~20:00) 각각 5시간30분씩 ‘단식’하면서 농성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의원들이 바쁜 때이기 때문에 취지를 같이 하면서 진정성을 알리기 위해 조를 나눴다”(나경원 원내대표)는 설명이었지만, 단식 참가자 개개인으로서는 기껏해야 점심이나 저녁을 평소보다 약간 늦게 먹는 데 불과해 단식이 아니라 ‘릴레이 다이어트’라는 조롱을 받았다. 뒤늦게 용어를 ‘릴레이 단식’에서 ‘릴레이 농성’이라고 바꿨지만, 약자의 저항 및 최후의 항의 수단으로서 행해져왔던 그동안의 비장한 단식과 비교할 때 매우 이례적인 방식임은 분명하다.

전두환 정권의 독재정치에 항의해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3년 5월 18일부터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옆은 부인 고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씨. <한겨레> 자료 사진
전두환 정권의 독재정치에 항의해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3년 5월 18일부터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옆은 부인 고 손명순 여사와 아들 현철씨. <한겨레> 자료 사진
1990년 10월 거대 여당인 민자당의 독주에 맞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는 13일 간의 단식에 벌여 지방자치제 실시 약속을 이끌어냈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90년 10월 거대 여당인 민자당의 독주에 맞서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는 13일 간의 단식에 벌여 지방자치제 실시 약속을 이끌어냈다. <한겨레> 자료 사진

죽음 불렀던 80년대 단식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파장이 컸던 단식은 1983년 김영삼 당시 야당 지도자가 결행한 것이었다. 1979년 12·12와 1980년 5·17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세력이 폭압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제5공화국 시절이었다. 당시 전두환 독재정권은 주요 야당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선거 출마도 못하게 정치활동 규제로 묶어놓았다. 그러고도 모자라 김영삼에 대해서는 상도동 자택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가택 연금을 실시했으며, 김대중에 대해서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조건을 달아 미국으로 사실상 내쫓은 상태였다. 형식상 야당이 있었지만, 여당 2중대, 3중대로 불리는 관제 야당이었다.

김영삼은 광주항쟁 3주년인 그해 5월18일 자택에서 ‘단식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에 들어갔다. “나는 이번 단식 투쟁에서 나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나 하나의 생명을 바쳐 이 나라의 민주화에 다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나의 최후의 봉사라고 생각하고 모든 것을 감수하고자 합니다.” 정권의 보도 통제로 인해 그의 단식 소식은 끝날 때까지 국내 언론에는 “현안” “최근의 정세흐름”이라는 모호한 용어로 일부 다뤄졌지만, 외신에는 시시각각 보도됐다. 또, 입에서 입을 통해 재야 민주화세력과 청년 학생, 야권에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부담을 느낀 정권은 김영삼에게 해외 출국 등을 권했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건강 상태가 악화돼 병원에 실려간 뒤에도 음식을 거부하다가 윤보선 전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등 원로들의 호소를 받아들여 23일만인 6월9일 단식을 중단했다.

김영삼의 단식은 전두환 독재정치에 금이 가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다. 우리 사회 민주화 투쟁의 불길을 당겼으며, 서슬퍼런 전두환 독재에 숨죽이고 있던 야권을 각성시켰다. 그의 단식을 계기로 야권의 양대 계파였던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가 다시 뭉쳤다.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은 그해 광복절에 ‘민주화투쟁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이듬해 5월18일에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만들어 단일 투쟁대오를 형성했다. 민추협은 신한민주당 창당으로 이어지고, 신한민주당은 1985년 12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켜 제1야당이 된다. 김영삼의 단식으로 형성된 ‘정세 흐름’은 결국 1987년 6월항쟁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 체제에 들어가기 얼마 전인 1972년 6월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의 김홍일 당수가 여당인 공화당이 임시국회를 파행시킨 데 항의해 6일간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김영삼 이전에도 정치인 단식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의 단식은 이전과 달랐다. 시위 차원에서 한번 해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투쟁 방법이었다. 실제로 1982년 전남대 학생회장 출신의 학생운동 지도자 박관현은 광주교도소에서 5·18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 40여일간 단식 농성을 벌이다가 10월12일 끝내 숨졌다. 또, 1981년에는 북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추구하던 ‘아일랜드 공화국군(IRA)’ 소속의 투사들이 교도소 내 단식 투쟁을 벌여 10명이 숨졌다. 특히 그 중 66일만의 단식 끝에 숨진 보비 샌즈의 죽음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김영삼이 단식에 즈음한 성명에서 “나에 대한 어떠한 소식이 들러더라도 그것에 연연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오히려 민주화에 대한 우리 국민의 뜨거운 열정과 확고한 결의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나의 호소요 당부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과장법으로 여겨질 수 없던 시절이었다.

1990년 10월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의 단식 역시 정치 흐름을 바꿨다. 그해 초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이 된 민자당은 지방자치제 실시 등 이전에 했던 정치적 약속을 무시한 채 내각제 개헌 등을 추진하려고 했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졸지에 소수 야당 신세가 된 김대중이 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띄운 승부수가 바로 야당 대표의 단식이었다. 단식 기간은 13일에 불과했지만, 그의 투쟁은 결국 1991년 상반기 지방의회 선거, 1995년 6월 지방단체장 선거라는 결실을 맺었다. 전면적인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1995년 지방선거 승리를 통한 김대중의 정계 복귀와 1997년 첫 정권교체의 발판이 됐다.

정치인으로 가장 길게 단식한 이는 전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다. 그는 2005년 11월 쌀 협상 비준동의안에 반대해 무려 29일 동안 단식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치인으로 가장 길게 단식한 이는 전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이다. 그는 2005년 11월 쌀 협상 비준동의안에 반대해 무려 29일 동안 단식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전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은 2007년 6월 제주 군사기지 건설에 항의해 27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전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은 2007년 6월 제주 군사기지 건설에 항의해 27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제주/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정치인 단식 최장기 1·2위는 강기갑·현애자

19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정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에는 단식의 양상이나 의미가 변했다. 특정 정책에 대한 요구나 반대, 또는 자신의 소신을 밝히거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 등 단식이 일상의 정치활동에 다양하게 활용되기 시작했다.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투쟁 수단으로 여겨졌던 단식의 일상화를 앞당긴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독재자 전두환이었다. 집권 중 뇌물 수수와 12·12, 5·17 군사반란 등의 혐의로 1995년 구속 수감 중이던 전두환은 안양교도소에서 “5공화국의 정통성을 지키겠다”며 28일 간 단식 농성을 벌였다. 동정보다는 국민들의 비판이 더 거세지자 결국 단식을 중단했지만, 단식 투쟁이 지녔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지방은 그후 사라졌다.

2000년 시민단체의 낙선운동에 항의한 김상현(민주당 의원)의 3일간 단식 농성, 2001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언론사 사주 구속에 항의한 박종웅(한나라당 의원)의 20일간 단식 농성은 꽤 유용한 투쟁 방안이 정치권에 새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2003년 11월말부터 12월초까지 당시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 대표 최병렬은 열흘간 단식 농성을 통해 노무현 측근 비리 수사를 위한 특검 도입을 관철했다. 단식 등 극단적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보수세력이 새로운 정치 무기를 쥐게 된 출발점이었다. 지난해 5월 9일간의 단식 농성을 통해 ‘드루킹 특검’을 따낸 김성태(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모델이었던 셈이다.

정치적 힘이나 명분이 있을 경우 단식 투쟁은 단기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지난해 12월 연동형 비례제 도입을 요구하면서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12일간 단식 농성을 벌인 손학규(바른미래당 대표), 이정미(정의당 대표) 두 사람의 투쟁도 명분에 힘입어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가동까지는 비교적 쉽게 이끌어냈다. 앞서 2016년 6월 박근혜 정부의 지방재정 개혁안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흘 동안 단식 농성을 벌였던 이재명(당시 성남시장)의 투쟁도 지방재정 독립이라는 명분에다가 전국적 관심 대상이 됨에 따라 대선주자급으로 성장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단식이 일상화되다시피 하면서 투쟁의 강도가 더 세다하더라도 대부분은 별다른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민주노동당 의원 강기갑은 2005년 말 쌀 협상 비준 동의안에 반대해 국회 본청에서 무려 29일 간 단식을 벌였다. 정치인의 최장기 단식이지만, 비준안은 그대로 통과됐다. 제주 군사기지 건설에 반대한 같은 당 의원 현애자(2007년 6~7월)의 27일간 단식 농성도 기록으로만 남았다. 민주노동당 대표 문성현과 열린우리당 의원 천정배도 2007년 3~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반대해 각각 26일과 25일씩 단식했지만 별무성과였다. 2013년 11월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 철회를 위한 김미희, 김선동, 김재연, 오병윤, 이상규 등 통합진보당 의원 5명의 공동 단식 농성도 최후의 1인(김선동)이 남을 때까지 24일간을 버텼지만, 정당 해산을 막지 못했다.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는 집권여당의 대표로서 2016년 9월 단식을 벌였다가 안팎의 비판을 받았다. 단식 닷새째인 9월 30일 그를 찾아온 김재원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왼쪽)과 정진석 당시 원내대표.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는 집권여당의 대표로서 2016년 9월 단식을 벌였다가 안팎의 비판을 받았다. 단식 닷새째인 9월 30일 그를 찾아온 김재원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왼쪽)과 정진석 당시 원내대표.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여당 대표 이정현의 단식 충성

처음부터 구체적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기보다 정치 철학이나 소신을 밝히는 차원에서 단식이 이뤄지기도 했다. 2003년 9월 “민주당 분당 사태에 대한 석고대죄”를 내걸고 사흘간 진행한 민주당 의원 김근태의 단식이 대표적이다. 또 같은 해 10월 정부의 이라크 전투병 파병에 반대한 임종석(열린우리당 의원)의 13일간 단식 농성도 여당 의원으로서 정부와 다른 정책적 소신에 따른 경우다. 2014년 12월 경남도청의 진주의료원 폐원에 항의한 김용익(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6일간의 단식, 2011년 11월 “한미 FTA 합의 처리”를 요구하는 정태근(한나라당 의원)의 열흘간의 단식도 소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형 단식’도 있다. 2014년 8월 문재인(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위해 30여일째 단식 중이던 ‘유민아빠’ 김영오 옆에서 동조 단식을 열흘간 벌인 것이 대표적 사례다.

보스를 위한 ‘충성형 단식’도 있었다. 이정현(새누리당 대표)은 2016년 9월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건이 막 터져나오던 때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 표결을 이유로 국회의장(정세균)의 사퇴를 요구하면서 국회 대표실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여당 대표가 정기국회 활동을 중단하면서 단식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으나, 국민의 비판에 직면해 결국 7일 만에 포기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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