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부터), 심상정 정의당 대표,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이재명 성남시장이 8일 오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서울 세종대로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한국여성대회에서 성평등 정책에 대해 각각 입장을 밝힌 뒤 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누가 진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될 것인가. 지난해 5월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혐오·성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이 본격화된 가운데 치러지는 올해 대선에선 후보들의 ‘젠더 감수성’도 중요하게 고려될 것으로 보인다. 109회째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은 8일, 각 당의 대선주자들은 저마다 진정한 ‘여성주의자’임을 자임했다.
크게 노선이 갈리지 않는 노동·보육 문제 등에서 대선주자들의 약속은 대동소이하다. 여성 노동자 경력단절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양육 부담을 덜기 위해 육아휴직제를 개선하고 국공립어린이집 이용률을 높이는 방안 등이다. 현재 10%대인 국공립어린이집 이용률의 경우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40%까지 높이겠다고 밝혔고 이재명 성남시장은 50%까지, 안희정 충남지사는 30%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남경필 경기지사는 현재 경기도에서 시행 중인 ‘경기도 따복어린이집’ 모델을 전국으로 확대해 민간 어린이집을 공공형 어린이집으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여성계에서는 “그동안 사설 어린이집 등 이익단체의 반발이 워낙 커 국공립 확충이 어려웠던 만큼 이번 대선에서 국공립 확대가 공통 공약으로 굳어진 것은 환영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여전히 ‘유리천장’이 강고한 노동 영역에선 ‘차별적 임금 정상화’, ‘여성임원 할당제’ 등이 공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의원과 민주당 소속인 이재명 시장, 안희정 지사가 모두 ‘공공부문 여성임원 30%로 확대’를 약속했다. ‘육아휴직 3년법’, ‘칼퇴근 보장법’을 1·2호 대선공약으로 발표한 유 의원은 이날 “여성과 남성의 임금격차와 차별,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는 여성 장관 30% 임명을 약속하고, 민간부문에선 대기업의 고용형태 공시와 공공기관 경영 공시에 ‘성평등임금 공시제’를 도입하는 정책을 제시했다. 문 전 대표의 경우 “남녀 동수 내각을 향해 노력해야 한다”면서도 정리된 공약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각 후보들은 여성계 인사와의 스킨십도 강화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문 전 대표가 가장 적극적이고 공세적이다. 문 전 대표는 여성계를 대표하는 이미경 전 의원(민주당·5선)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영입한 데 이어, 이날 여성학자인 권인숙 명지대 교수를 새 영입인사로 소개했다. 권 교수는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폭로한 피해자로, 성폭력 전문연구소 ‘울림’을 이끄는 등 젠더 폭력 문제를 고민해왔다. 이재명 시장은 한국여성학회 회장을 지낸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와 공부모임을 열어 젠더 이슈를 고민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대부분 주자들의 성평등 공약이 정작 첨예한 논란이 일고 있는 쟁점은 피해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2015년 이후 꾸준히 문제시되고 있는 ‘여성혐오 범죄’를 두고 유일한 여성 후보인 심상정 정의당 대표를 제외한 후보들은 뾰족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문 전 대표가 강남역 살인사건, 문화계 성폭력 사건 등을 언급하며 “젠더 폭력 가해자에 대한 단호한 처벌”을 약속했지만 대책은 친족·장애인 성폭력에 대한 가중처벌에 그쳤다. 심 대표의 경우 데이트 폭력, 스토킹 폭력, 디지털 성폭력을 ‘신종 3대 여성폭력’으로 규정하고 ‘여성폭력방지기본법’ 제정을 약속했다.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를 보호하기 위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도 대부분의 후보가 미온적인 입장이다. 이재명 시장은 이날 내놓은 성평등 공약에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여성가족부를 성평등부로 전환해 정부 부처의 지향점과 정체성을 명확히 하겠다”고 밝혔다. 심상정 대표는 차별금지법 제정은 물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법적으로 보장해줄 ‘동반자등록법’ 제정도 공약했다. 반면 문 전 대표를 비롯한 다른 후보들은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거나 시기상조라고 보고 있다.
배은경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1999년 제정된 남녀차별금지법이 폐지된 것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라며 “‘페미니즘 리부트(재시동)’라고 할 만치 강력하게 여성들의 요구가 터져나오는 시기인 만큼 포괄적 차별금지법 약속이 어렵다면 성차별금지법 제정이라도 우선 약속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이어 배 교수는 “대부분의 공약들이 겹쳐 후보자들 간의 차별화가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성차별에 반대하고 성평등을 지지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라고 덧붙였다.
엄지원 김남일 송경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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