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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회·정당

‘살아남은 자’의 책임으로 지역주의와 맞짱 뜬 ‘경계인’

등록 2016-04-15 20:39수정 2016-04-16 13:35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당선자(대구 수성갑)가 14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 대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당선자(대구 수성갑)가 14일 오전 대구 수성구 범어네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당선인사를 하고 있다. 대구/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토요판] 특집
31년만의 대구 야당 당선자 김부겸
▶ 더불어민주당의 김부겸 후보가 민주당 계열로서는 31년 만에 처음으로 보수의 심장부인 대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부겸은 “월급쟁이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며 5년 전 경기도 군포를 떠나 대구로 내려갔다. ‘국회의원 한번 더’가 아니라 앞으로는 ‘김부겸 정치’를 하겠다는 출사표였다. 이제 그 토대가 마련됐다. 20대 국회에서 주목되는 정치인 김부겸은 누구이며 생각은 뭔지를 알기 위해 대구 현지를 찾았다.

“이제 대구에도 희망이 보입니다. 대구의 변화는 야권 나아가 한국 사회 전체에 새바람을 불어넣지 않겠어요?”

20대 총선 개표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 13일 밤, 대구 수성갑의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후보 선거사무실에서 만난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는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이번에도 김부겸 후보가 떨어지면 나도 대구를 떠날까 생각했더랬습니다. 수십년간 여당만 뽑고 보수 일색인 분위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이제는 대구시민으로서 어깨 펴고 살아도 되겠네요”라며 기뻐했다. 이날 밤늦게까지 김부겸 선거사무소는 꺼내놓고 싶었던 불덩어리를 하나씩 가슴에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김부겸이 지난 30년간 무너지지 않았던 대구의 지역주의 벽을 마침내 깼다. 이강철, 유시민 등 내로라하는 역대 야당 실력자들도 실패했던 일이다. 노무현조차 대구보다 개방성이 훨씬 강한 부산에서 세차례나 지역주의의 벽 앞에 무릎을 꿇었다.

5년 전인 2011년 12월 “월급쟁이 정치인은 되지 않겠다”며 탄탄한 지역구(경기 군포)를 버리고 내려올 때만 해도, 그가 이렇게 빨리, 그것도 압도적인 표 차이(김부겸 62.3% 대 김문수 37.7%)로 당선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이정옥 대구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이번에도 투표율이 다른 곳보다 훨씬 높아 저쪽 유권자들이 몰려 나온 게 아닌가 걱정했다”며 “대구 유권자들이 이 정도로 변했는지는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지역 정치권을 취재했던 대구지역 방송의 ㅅ 기자는 선거 직전까지 “선거전 시작될 때까지만 해도 막판에는 김문수가 뒤집을 거라고 다들 봤다. 그동안 대구에서의 투표 결과가 늘 그랬지 않나. 그런데 이번에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그래도 뚜껑을 열면 51 대 49가 되지 않을까 싶다”고 조심스런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대구에서 차세대 리더 1위

하지만 밑바닥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변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9대 총선 때 김부겸이 얻은 득표율(40.4%)과 2년 전 지방선거 때의 득표율(40.3%)은 변화를 바라는 대구시민들의 기대가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준다. 대구시장 선거 당시 수성갑에서는 50.1%를 얻어 새누리당의 권영진 후보를 앞섰다. 이번 선거전에서는 올해 초부터 나온 여론조사에서 한번도 김문수에게 진 적이 없었고, 격차는 대부분이 10%포인트 이상을 기록했다.

기자는 선거 열흘 전부터 김부겸의 이른바 ‘벽치기 유세’를 따라가봤다. 김부겸은 수성구 황금2동의 편도 2차선의 도로가에 유세차량을 세우고는 주변 건물과 아파트 단지 등 ‘손님’ 한명 보이지 않는 텅 빈 공간을 향해 혼자 ‘떠들었다’. 10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나가면서 차창을 내리고 손을 흔드는 이, 경적을 울리는 이, 오토바이를 잠시 멈춰 놓고는 악수를 청하는 택배기사, 차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찍고 가는 이 등 우호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만 열명이 넘었다. 동네에서는 인기 연예인이었다.

이러한 반응은 단순한 친밀감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지난해 5월 대구방송(TBC)이 특집방송(‘신대구경북인, 변화의 바람이 분다’) 때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김부겸은 시민들이 꼽은 대구의 차세대 리더 1위였다. 오피니언 리더층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유승민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대구 사람들은 이미 김부겸을 자신들 곁에 두어야 할 ‘동네 정치인’을 넘어 자신들의 대표상품으로서 내놓고 싶어하는 ‘전국구 정치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정옥 교수는 개표를 지켜보면서 “대구 유권자는 이 사람이 내셔널 지도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고 표를 준 것 아니겠느냐”며 “야당에서 가져올 수 없는 표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 즉 확장성을 가진 정치인이기에 앞으로 가능성은 무한해 보인다”고 말했다.

김부겸의 지난 5년이 일궈낸 변화다. 그는 대구에서 지역주의에 도전했던 전임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2012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유시민이 남긴 뼈까지 묻겠다”며 대구에 남았다. 휴일도 없이, 밤낮도 가리지 않고 수성구 골목골목을 누볐다. 휴대전화번호도 유권자들에게 공개했다.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밤늦게 포장마차로 ‘호출’되는 걸 오히려 즐겼다. ‘김부겸과 소주 한잔 먹어봤느냐’는 말이 수성구에서는 한때 유행이었다. 대구에 전에 없던 풍경이었다. 선거 때만 잠깐 내려왔다가 서울에서 온통 시간을 보내는 정치인만 대하다가 자신들의 목소리에 늘 귀 기울이는 김부겸을 보자, 수성구민들은 정치를, 또 야당을 다시 봤다. “처음에 사람들이 야당 자체를 아주 어색하게 생각했다. 어딘가 별나거나 모자라거나 빨간 놈으로 생각하더라. 그래서 만나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줄기차게 유권자들을 만나니까 그 사람 솔직하대, 괜찮대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하더라. 정치 후배들한테 니들도 정치를 하려면 최소한 2년 전부터는 바닥을 기어라. 정치변혁은 머리가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싹트는 거다.” 선거 다음날인 14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 때 “왜 그렇게 골목을 누볐는가”를 물었더니 김부겸이 내놓은 답이다.

하지만 김부겸의 압도적 당선은 부지런함이나 성실성, 유권자와의 밀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야당 정치인이 보수의 텃밭에서 62%, 그것도 여권의 잠재적 대선주자로 불리는 강력한 상대방과의 싸움에서 높은 지지를 얻은 것은 다른 뭔가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김부겸 후원회의 이영동 대표는 “김부겸에 대한 대구 사람들의 애정도 크지만, 이제는 대구도 변해야 한다, 여당만 30년 넘게 밀어줘서 대구에 남은 게 뭐냐는 불만이 워낙 높았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변화 욕구에 후보가 딱 들어맞았던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대구에서 만난 많은 시민들은 ‘김부겸 인물론’보다는 ‘대구 변화론’을 더 많이 얘기했다. 수성구청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추아무개씨는 “이정현씨도 호남에서 국회의원이 되는데 대구도 이제 야당 국회의원 한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를 많은 손님들이 하더라”고 말했다. 택시운전을 하는 김아무개(49)씨는 “동네에도 슈퍼가 두개 이상이 되어야 값도 싸지고 서비스도 좋아진다. 정치도 경쟁체제가 되어야 한다. 다른 곳은 다 그렇게 하는데 대구만 그동안 너무 뒤처져 있었다”고 말했다.

올 들어 여론조사 내내 앞서다
거물 김문수에 25%p 차 대승 거둬
전문가들도 막판까지 “설마” 의심
‘발목잡는 야당론’ ‘색깔론’ 안 먹혀
“변화 바라는 대구 민심 반영” 평가

4년 전 패배 뒤 골목골목 누벼
‘김부겸과 술 먹어봤냐’는 말 유행
연예인 같은 인기 얻은 비결
김, “야당 편견 깨기 위한 노력”
“최소 2년 바닥 기어라” 조언

이번엔 ‘박정희 마케팅’ 안 해

이번 선거에서 김부겸은 ‘일하는 정치인’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선거사무소 건물 외벽에도 “대구의 아들딸들을 위해 일하겠습니다”라는 글귀를 내걸었고, 선거공보물 제목도 “일하고 싶습니다”로 정했다. 중앙 정치나 여야 싸움 말고 철저하게 실용적인 접근이었다. 2년 전 지방선거 때 플래카드에 박근혜와 활짝 웃는 사진을 싣고, 공약으로 박정희 컨벤션센터를 짓겠다는 등 ‘박정희 마케팅’을 펼쳤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박정희 마케팅에 대해, 김부겸은 14일 인터뷰에서 “저들이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지점인 박정희와 근대화 가치를 승인을 하는 대신에 당신들은 김대중과 민주화라는 가치를 받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이 내 요청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저에 대한 경계심을 많이 풀었다고 하더라. 그런 게 맞지 않나. 박정희와 근대화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수구꼴통이라고 걷어차거나 우리 공동체 바깥으로 쫓아낼 수는 없지 않나. 상생하고 공존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부겸을 가까이서 오랫동안 도왔던 이진수 기획실장은 “지방선거 때 그러한 운동이 후보의 운동권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야당에 대한 거부감을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됐던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그런 것은 한번이면 족하다. 통과세 이미 냈는데 다시 할 필요는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그의 일꾼론에 김문수 쪽은 “발목 잡는 야당을 뽑아서 되겠느냐”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김부겸이 제도정치권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1988년 한겨레민주당을 통해서였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따낸 민주화 국면에서 김대중-김영삼 양김씨의 분열로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야권이 패배하자, 재야 민주화운동세력이 이듬해 총선(13대)을 앞두고 독자세력화한 정당이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재야의 막내세대 김부겸도 한겨레민주당에 자연스레 참여했다. 이때 김부겸은 서울 동작갑에 처음 출마했지만, 미미한 성적을 얻는 데 그쳤다. 한겨레민주당이 실패한 뒤 이우재, 이재오, 김문수 등은 민중당을 만들어 나가고, 이부영, 유인태, 원혜영, 김부겸 등은 이른바 ‘꼬마민주당’(1991)에 합류한다. 1990년의 3당 합당(노태우·김영삼·김종필)에 반대한 이기택,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장석화 등 통일민주당 잔류파가 중심이 돼 만든 정당(민주당)으로, 소속 의원이 적어 꼬마민주당으로 불렸다.

김부겸의 본격적인 정치수업은 김대중이 이끄는 제1야당에서 시작됐다. 1992년 대선을 앞둔 1991년 9월 꼬마민주당이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평화민주당의 후신)과 합당을 한 데 따른 일이다. 이때가 김부겸으로서는 정치인생 제1막이다. 그는 노무현, 홍사덕 대변인 밑에서 부대변인으로 일했으며, 이어 당무기획실을 이끌던 제정구 아래에서 부실장으로 활약했다. 김대중이 ‘키워야 할 젊은 정치인 여섯명’ 가운데 한명으로 꼽았을 정도로 제1야당에서의 김부겸은 장래가 밝아 보였다.

이 시절 아찔했던 사건도 있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가 기획 발표한 ‘이선실 간첩단’ 사건이다. 이선실이 사건 발생 3년 전 야당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김부겸에게도 장모를 통해 접근해왔다. 젊은 정치인을 도우려는 착한 이웃 할머니인 줄 알고 몇차례 만났고, 그 할머니가 집에 생활비로 사용하라며 500만원권 수표를 두고 갔다. 그 뒤 “혁명 대오”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는, 그는 “나는 합법적인 정치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지 혁명을 꿈꾸는 사람이 아니다”며 내쫓았다. 하지만 안기부는 그를 국가보안법의 간첩과의 회합, 금품수수, 불고지죄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법원에서 불고지죄 빼고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번 총선에서 상대 후보 쪽은 이 사건을 끄집어내 구전으로 ‘김부겸이 간첩한테 돈을 받았다’고 색깔론을 펴기도 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김부겸 쪽은 “조작된 내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김문수 후보가 그런 식의 색깔론을 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통추’ 활동 거치며 철학 싹터

김부겸의 첫번째 정치적 시련은 후원자를 자처했던 김대중한테서 비롯됐다. 1992년 대선 패배 뒤 영국으로 떠났던 김대중은 1995년 지방선거 한달 뒤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그러고는 신당 창당에 나섰다. 1997년 대선 출마를 향한 정치적 수순밟기였다. 제1야당 민주당의 쇠락은 불보듯 뻔했다.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김대중을 따라 탈당했고,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가 출범했다. 그러나 김원기, 유인태, 원혜영, 제정구, 김정길, 노무현 등과 함께 김부겸은 신당 창당에 반대하면서 민주당에 남는 쪽을 택했다. 대세보다는 명분을 좇았다. 이듬해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과천·의왕에서 출마한 김부겸은 16%를 받고는 낙선했다. 그가 속한 민주당도 당선자가 15명밖에 되지 않는 원외정당으로 하루아침에 전락했다.

하지만 이때야말로 정치인 김부겸의 사고와 철학이 싹트는 시기였다. 당권을 쥔 이기택에 맞선 ‘국민통합추진위원회’(통추) 활동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김원기, 노무현, 제정구, 이강철, 김정길, 김원웅, 원혜영, 박석무, 이철, 홍사덕, 이미경 등 야권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인 통추에서 김부겸은 막내로 참가했다. 특히 서울대 정치학과 선배이자 빈민운동을 함께 하기도 했던 제정구는 김부겸의 정치적 멘토이자 스승이었다. 1997년 11월 대선 직전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해서 소속 정치인들이 정치적 선택을 내려야 할 때도, 그는 제정구를 따라 합당으로 새로 생기는 한나라당으로 옮겨갔다.

김부겸은 제정구가 1999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남긴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모순과 대립을 통한 세계의 발전이라는 명제는 이제 불가능하다.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식의 정치 행태도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는 상극이 아니라 상생의 시대가 될 것이다. 화해와 상생, 통합의 정치만이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다.” 김부겸이 타협과 절충을 중시하고, 화해와 상생의 정치, 공존의 정치를 자신의 정치철학으로 삼은 것은 제정구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나라당 시절은 김부겸에게는 ‘경계인’으로서 자리매김돼가는 기간으로 보인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경기도 군포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당선돼 오랫동안 그리던 국회에 들어갔지만, 김부겸은 당내에서 정체성 시비에 곧잘 시달렸다. 국가보안법 존속 당론에 맞서 의원총회에서 토론을 요구했다가 제지를 당하는 등 당론과 배치되는 의견을 자주 냈다. 그는 “제도 정치를 배우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지만, 두고두고 정체성 때문에 시비를 달고 살아야 했으니 내 가슴에 박힌 주홍글씨인 셈이다”(<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 2015년)라고 이 시절을 회고했다.

2002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뒤에는 이부영, 이우재, 원희룡, 김영춘, 안영근 등 개혁파 의원들과 함께 당풍 및 노선 쇄신운동을 시작했다. 한나라당을 내부에서 고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당 주류인 보수파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공격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 한나라당이 밀어붙이던 대북송금특검법에 대해 김부겸이 본회의장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김용갑 의원은 김부겸에게 “어이, 김부겸 의원, 평양에서 감사 전화 안 왔어?”라고 야유를 보내는 등 보수 주류는 그를 본격적으로 왕따를 시켰다. 결국 김부겸은 이부영, 이우재, 안영근, 김영춘 등 ‘독수리 5형제’로 불리는 개혁파 의원들과 함께 2003년 7월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김부겸의 정치인생 제2막이 시작됐다. 그해 11월 한나라당 탈당파 5인과 민주당 탈당파 40인, 개혁당 출신 2인 등 47석의 열린우리당이 창당될 때 김부겸은 사회를 봤을 정도로 새 출발에 기대를 걸었다. 남의 옷을 입고 있던 느낌이었던 한나라당을 떠나 이제야 제집을 찾은 듯했다. 2005년 정세균 원내대표 아래에서 원내수석부대표를 맡아 일할 때만 해도 그는 의욕이 넘쳤다.

제1야당에서 정치수업 시작
1997년 합당 때 한나라당행
정체성 시비 끝 스스로 탈당
열린우리당서도 ‘경계인’ 처지
군포 떠나 대구행…큰 정치 꿈

대학 때 아크로폴리스의 사자후
‘서울역 회군’ 뒤 광주 희생 죄책감
정치적 멘토이자 스승인 제정구
상생하는 공존정치 중요성 배워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이룰 것”

주류에 끼지 못한 ‘경계인’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 후보자 공명선거 서약식이 2010년 5월3일 오전 국회 민주당 당대표실에서 열려 후보자들이 서약서에 서명을 한 뒤 취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지원·박병석·이석현 의원, 정세균 대표, 이낙연 선관위원장, 김부겸·강봉균 의원이 서약서를 들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 후보자 공명선거 서약식이 2010년 5월3일 오전 국회 민주당 당대표실에서 열려 후보자들이 서약서에 서명을 한 뒤 취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지원·박병석·이석현 의원, 정세균 대표, 이낙연 선관위원장, 김부겸·강봉균 의원이 서약서를 들고 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하지만 자발적으로 복귀한 ‘정통 야당’에서도 그는 경계인이었다. 야당 주류는 김부겸에게 좀체 곁을 내주지 않았다. 수도권 3선 의원으로서 지명도가 있음에도, 전당대회 한번(2006년)과 원내대표 경선 세번 등 당내 선거에서는 번번이 낙선했다. 그때마다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2010년 전당대회에서 손학규가 당 대표에 당선된 뒤에는 차기 사무총장을 맡을 것이 유력했지만, 손학규는 막판에 이낙연을 임명했다. 그는 격하게 반발했다. “나한테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도 당의 객이 아니라는 상징적 의미가 컸다. 나도 당의 주인이라는 당당함을 갖고 싶었단 말이죠.”( 2호-김부겸. 2015년) 사무총장 자리에서조차 밀려나자, 김부겸은 같은 당 의원들에게 장문의 육필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잔뼈가 굵고 전통 민주당에서 정치를 시작하고 청춘을 바쳤던 ‘민주당 출신’ 정치인”이라며 “본의 아니게 한나라당에 몸담았다는 것이 원죄라면 언제든지 그 값을 달게 치르겠다. 부디 외면하지만 말아달라”,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낙인과 멍에를 제 어깨에서 좀 벗겨달라”고 호소했다. 장세환 의원 등이 그를 받아들이자는 위로의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김부겸은 많은 학생운동가 출신들과 달리 야당 안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성향을 지녔다. 누구와도 두루 친하며, 진영논리를 싫어한다. 노무현 정부 때 당시 여당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박근혜 대통령 동생 박지만씨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화는 김부겸 정치의 단면을 보여준다.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 정신차리고 한 가정을 이룬다니 축하할 일이었다. …박준규 의장, 박태준 회장도 계셨는데 ‘아이고, 이놈아, 네가 오늘 밥값을 한다. 정치를 그렇게 해야 한다’면서 무척 기뻐했다. 정치판도 사람 사는 곳이다.”(<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 하지만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야당의 선명한 투쟁이 박수받는 상황에서 이러한 광폭의 정치, 상생정치는 설 자리가 좁은 게 사실이었다. 그의 고민은 깊어져 갔다.

2011년 12월15일 국회 정론관에서 김부겸 의원(경기 군포·3선)이 기자회견을 열어 2012년 총선에서 “당의 전국정당화를 위한 외연을 확대하고, 자기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구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2011년 12월15일 국회 정론관에서 김부겸 의원(경기 군포·3선)이 기자회견을 열어 2012년 총선에서 “당의 전국정당화를 위한 외연을 확대하고, 자기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구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19대 총선(2012년)을 다섯달 앞둔 2011년 12월15일 김부겸은 기자회견을 열어 “저는 지금 지역주의, 기득권, 과거라는 세개의 벽을 넘으려 합니다. 그 벽을 넘기 위해 대구로 가고자 합니다”며 차기 총선 대구 출마를 선언했다. 더구나 유시민처럼 무소속도 아니고 제1야당 간판을 달고 나가겠다고 했다. 초·중·고교 시절을 보낸 대구가 그에게 고향이나 마찬가지이긴 했으나, 누가 봐도 낙선이 예상되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대구는 1988년 소선거구제로 변경된 이후 한번도 정통 야당 후보에게는 자리를 내주지 않은 야당 불모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왜 험지 중 험지로 자원해서 갔을까? “경기도 군포에 있었으면 국회의원 한두 번 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 김부겸으로 남길 것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면 성실한 의정활동을 한, 그럭저럭 괜찮았던 국회의원으로 끝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를 움직인 것은 부채의식이었다. 나는 국회의원도 했고 정치인으로 살아남았지만 꿈을 접고 응어리를 풀지 못한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가슴 한가운데 묵직한 돌덩어리로 남아 있다. 그렇게 남은 삶에 대한 어떤 책임, 그러니까 살아남은 자의 책임이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이다.”(<공존의 공화국을 위하여>) 그의 한 핵심 측근은 최근 기자에게 “당내 선거에서 매번 지니까 뭔가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김부겸이 두루두루 좋은 정치인이긴 한데 이것으로는 정치지도자가 되기에는 약하다는 판단에서 지역주의와의 정면대결을 검토했다. 떨어질 것이 뻔해 고민이 많았는데, 의원 본인이 길게 보자면서 최종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괜찮은 정치인보다 큰 정치인이 되겠다는 방향 전환이자 ‘정치적 야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강경파 맘대로 못하게 하겠다”

김부겸은 195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군 장교였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이사 가서 고등학교까지 대구에서 지냈다. 고교(경북고) 시절까지 평범했던 그가 역사와 사회에 본격적인 눈을 뜬 것은 1976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뒤부터였다. 유신독재정권의 억압 구조 속에서 정의감이 강하고 열정 많은 청년 김부겸은 점차 치열한 학생운동가로 변해갔다. 2학년 때인 1977년 서울대 도서관 점거시위와 관련해 수감생활을 했던 그는 80년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 대표로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 집회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학생지도자가 됐다. 그해 5월 역사적인 서울역 집회(13~15일) 때 군부의 개입을 우려해 철수를 주장하는 학생회장단과 달리 그는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맞섰다. 서울역 집회를 해산한 이틀 뒤 5·17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광주에서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시위 현장을 지켰던 내게 광주는 부채감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복받쳤다.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기점으로 시위 열기가 주춤하던 사이, 계엄군의 총부리가 광주로 향했다는 결과론적 원인 때문이다.”(<나는 민주당이다> 2011년) 80년 광주와 그 시절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희생자에 대한 부채의식은 아직도 김부겸을 밀어가는 힘이다.

김부겸은 대구 당선으로 이제 ‘전국 상품’(한인섭 교수 페이스북)이 됐다. 단숨에 당권 주자, 나아가 차기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 그는 선거 전부터 “대구에서 이기면 깃발을 들겠다”고 공개적으로 얘기해왔다. 당장은 전당대회 당권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는 14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안철수에게 자기들 정치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그 둘이) 합칠 수 있지 않으냐. 내가 그 일을 할 적임자라고 한다면 (전대 출마를) 고려해 보겠다”고 말했다. “강경파들이 의원총회 등을 통해 이른바 분위기를 잡아서 끌고가는 것을 막겠다”고도 했다. 내년 대선에 대해서는 “국회의원 한번 됐다고 대선에 나가니 어쩌니 하면 대구 분들이 싫어한다”면서도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그에게 선택지는 넓다. 앞으로 공간 활용과 성취는 전적으로 그 자신에게 달렸다.

대구/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 관련 기사 : 1997년엔 ‘정권교체’ 대 ‘세대교체’,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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