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원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26일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 전자출입명부(QR코드) 기기로 출입증을 발급받고 있다. 나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상속세율이 합리적인지 근본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연합뉴스
야당 일각과 보수 언론들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상속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상속세법 완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26일 비공개로 열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상속세 완화를 당이 나서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 나왔다고 한다. 보수 언론들도 10조원으로 추정되는 상속세가 ‘경영권 승계의 최대 걸림돌’이라거나 ‘삼성의 지배구조를 흔든다’는 식의 기사와 사설을 쏟아내고 있다. 나경원 전 의원도 페이스북을 통해 “상속세율이 합리적인지 근본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며 군불을 때고 나섰다.
이해 당사자인 이 부회장과 삼성 쪽이 요청하지도 않은 사안을 정치권과 언론이 앞장서서 대변하는 행태는 볼썽사납기 짝이 없다. 오죽하면 김종인 비대위원장이 회의에서 즉각 문제를 제기하며 “법이 있는데 어떻게 가능하냐”고 일축했겠는가.
이뿐이 아니다. 국회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인 보험업법 개정안도 경영권 승계의 걸림돌이라며 문제 삼는 주장이 나온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을 통해 유지되는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험업법은 그동안 삼성의 순환출자식 지배구조 탓에 차일피일 개정이 미뤄져온 대표적인 ‘삼성 특혜법’ 중 하나다. 금융당국이 수년 전부터 법 개정 이전에 자발적 개선을 거듭 요청했지만 삼성은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추모 분위기에 휘둘리면서 또다시 개혁 입법이 좌초되는 게 아닌지 우려가 든다.
이건희 회장의 공적에 대한 평가와 삼성의 경영권 승계는 별개의 문제다. 또 천문학적인 재산을 상속했으면 법에 정한 대로 세금을 내는 게 상식이다. 경영권 승계는 무엇보다 그동안 지배구조 개선 노력 없이 소수 지분으로 그룹 경영권을 유지해온 이 부회장과 삼성 일가가 스스로 풀어야 할 과제다. 정치권과 언론이 무리하게 나설 일이 아니다. 엘지·현대차 등 경영권 승계에 나선 다른 재벌 총수들도 마찬가지다. 세금 없는 대물림을 위해 온갖 불법·편법 논란으로 지탄을 받았던 과거와 절연하겠다는 전향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5월 대국민 사과문에서 “이제는 경영권 승계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며 “법을 어기거나 편법에 기대거나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정치권과 언론은 이 부회장 스스로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독려하고 감시하는 게 본연의 임무다. 되지도 않을 일에 쓸데없이 군불 때지 말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