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를 받고 있는 ‘엔(n)번방’ 가해자들이 앞다퉈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있다. 반성문 제출이 형량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의 14일 보도를 보면, 미성년자와의 유사 성행위를 촬영·유포한 혐의로 지난해 징역 3년형을 받은 이아무개씨 대한 판결문에 반성문을 참작한 것으로 나와 있다. 재판부는 “반성문 내용 등을 살펴볼 때 이씨가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씨는 이번 엔번방 사건에서도 불법 제작물을 유포한 것으로 드러났다. 2018년 엄청난 규모의 아동 음란물 ‘다크웹’을 운영하고도 1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손아무개씨 역시 500장이 넘는 반성문을 제출했다.
반성문 제출이 양형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떠나, 이런 판결문이 성범죄 가해자들에게 진지한 반성 대신 요식적 반성문 제출을 유도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실제로 포털 사이트에는 성범죄 반성문의 각종 샘플과 작성법이 떠 있고, 서식 판매와 대필 거래에 관한 정보까지 나돌고 있다. 양형위원회는 성범죄 양형 기준에서 특별 양형 인자로 피해자의 ‘처벌 불원’을, 일반 양형 인자로 행위자의 ‘진지한 반성’을 감경 요소로 두고 있다. 그러나 가해자의 진지한 반성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다 보니 가해자들이 형량을 줄이려고 반성문을 쓰거나 갑작스럽게 여성단체에 기부·봉사를 하는 일이 흔하다고 여성계는 지적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2월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형식적 기준을 넘어서 ‘진지한 반성’임이 확실히 드러날 때만 감경 요소로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체포 직전까지 인륜을 포기한 잔혹한 성범죄를 일삼다가 급작스러운 태세 전환이라고 할 만큼 순식간에 이뤄지는 ‘반성’에 어떤 진정성이 담겨 있는지 재판부는 꼼꼼히 살피고 신중하게 따져봐야 할 것이다. 뼈를 깎는 참회의 기록이어야 할 반성문이 ‘악어의 눈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