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8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숙환인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한진그룹 창업주인 고 조중훈 회장의 장남인 고인은 1999년 부친에 이어 최고경영자에 올라 대한항공을 세계적인 수준의 항공사로 키우는 데 기여했다. 또 국제항공운송협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 국내 항공업계의 이해를 대변했다. 고인은 2009년 평창올림픽 유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2018 평창올림픽’ 유치를 성사시키는 등 체육 발전에도 남다른 공헌을 했다.
하지만 고인의 말년은 오욕으로 얼룩졌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세계 해운업이 장기 침체에 빠지면서 한진해운이 경영난에 봉착하자, 고인은 2014년 회장직을 맡아 경영 정상화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국내 1위, 세계 7위 해운업체였던 한진해운은 2016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이듬해 청산됐다.
진짜 위기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왔다.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014년 ‘땅콩 회항’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은 데 이어, 지난해엔 차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가 ‘물컵 갑질’로 사회적 공분을 샀다. 이 과정에서 부인인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이 직원들에게 ‘갑질 폭행’을 일삼은 사실이 폭로됐고, 대한항공을 이용한 밀수와 외국인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 혐의 등도 드러났다. 고인도 270억원대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지난달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선 국민연금과 외국 연기금, 소액주주 등이 “기업 가치를 훼손하고 주주권을 침해했다”며 반대해 이사 연임이 부결됐다. 국내 재벌 총수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대한항공은 ‘관계자의 입’을 통해 “조 회장이 폐질환이 있어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대한항공 주총 결과 이후 사내이사직 박탈에 대한 충격과 스트레스 등으로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언론에 흘렸다. 외국에서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병세가 위중했다면 마땅히 이사진을 비롯한 주변에서 이사 연임 시도를 말렸어야 했다. 이제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그 의도가 의심스럽다.
일부 정치인들은 한술 더 떴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페이스북에 “연금사회주의를 추구하던 문재인 정권의 첫 피해자가 오늘 영면했다”는 글을 올렸고, 김승희 자유한국당 의원은 “문재인 정부는 취임 초부터 한진그룹 일가의 도덕적 문제를 화두로 삼고 지나친 경영권 개입을 시도했다. 그 결과 조양호 회장을 사내이사에서 해임하기에 이르렀다”며 “조 회장에게는 커다란 스트레스였고, 죽음에 이른 요인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는 글을 올렸다.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고인을 정쟁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파렴치한 짓이다. 이사 연임 부결은 고인이 자초한 것이며, 국민연금·외국 연기금·소액주주의 반대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고인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후계 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회사 안팎에선 고인의 장남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경영권을 승계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한진그룹의 위기가 자질과 능력이 떨어지는데도 총수 일가라는 이유만으로 경영을 맡아온 ‘가족경영 체제’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한진그룹에 필요한 것은 대대적인 경영 쇄신이다. 사내외적으로 신망을 받는 전문경영인에게 책임을 맡겨 ‘오너 리스크’를 해소하고 기업을 정상화할 때라고 본다. 고인의 유족과 임직원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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