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주주총회가 끝난 뒤 ‘대한항공 정상화를 위한 주주권 행사 시민행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단체 회원들과 박창진(오른쪽에서 세번째) 민주노총 전국공공운수노조 대한항공직원연대지부장이 주총 결과를 기뻐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70억원대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조양호(70) 한진그룹 회장이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이사 연임 안건이 부결돼 이사에서 물러나게 됐다. 재벌 총수가 주총에서 이사 연임에 실패한 것은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재벌의 ‘황제 경영’ 체제에 주주들이 힘을 모아 경종을 울린 것으로 평가된다.
조 회장이 이사 연임에 실패한 데는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국민연금은 26일 수탁자책임위원회를 열어 “조양호 회장이 기업가치 훼손 내지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며 반대 결정을 내렸다. 캐나다연금과 플로리다연금 등 외국 연기금들도 반대했다. 또 다수의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연임 반대 투표를 권고하고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연임 반대를 위한 의결권 위임 운동을 벌인 것도 영향을 끼쳤다. 그만큼 조 회장의 잘못이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얘기다.
재벌 총수라도 불법·비리 등 일탈행위로 기업 가치를 떨어뜨렸다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재벌 총수의 전횡과 독주를 견제해야 할 이사회가 총수 측근들로 채워져 제구실을 못하고 주총도 형식적으로 운용되다 보니, 총수가 경영권을 사실상 영구히 보장받아온 게 현실이다. 조 회장도 1999년 부친인 고 조중훈 회장에 이어 대한항공 최고경영자에 오른 뒤 20년 동안 자리를 지켜왔다.
조 회장의 이사 연임 부결은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원칙)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국민연금도 그동안 ‘주총 거수기’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고 이번에 첫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앞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통해 주주의 힘으로 경영진의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 더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조 회장 일가는 주총 결과의 의미를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한다. 조 회장 자신은 물론 부인과 자녀들도 온갖 불법·비리와 ‘갑질 폭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두 경영에서 손을 떼고 사내외적으로 신망받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 쇄신을 맡겨야 한다. 최대주주의 지위를 이용해 경영을 계속 좌지우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대한항공은 주총 직후 “조 회장이 이사직을 상실했을 뿐 경영권을 박탈당한 게 아니다. 미등기 임원이라도 경영을 할 수 있고, 한진칼 대표이사로서도 경영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조 회장의 공식 입장인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다.
다른 재벌들도 조 회장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경영권을 사유화해 기업을 망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투명 경영’과 ‘정도 경영’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재계 일부와 보수언론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두고 계속 트집을 잡고 있다. 전경련은 이날 “유감을 표한다”는 입장문을 냈다. 보수언론은 “연금 사회주의” 운운하며 색깔론까지 펼친다. 모두 시대착오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불법·비리로 기업에 큰 손실을 끼친 경영진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주주의 당연한 권리다. 부도덕하고 무능한 경영진을 감싸고도는 것이야말로 기업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더이상 사실을 호도하는 주장을 그만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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