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구 논설위원실장
경제민주화의 본질은 재벌로 대표되는 경제 권력을 민주적으로 통제하자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민주적으로 통제받지 않은 경제 권력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정도로 무분별하게 사업 영역을 확장하며 호황을 누리지만 강력한 재벌체제에 종속된 다수의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피폐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곧 국민경제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우리 현실이 바로 이 모양 그대로다.
물론 통제받지 않은 재벌이 국민경제에 해악만 끼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리 경제가 이 정도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일류 상품을 만들 만큼 성장한 대기업의 덕이 컸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많은 부작용이 있었지만 우리 경제는 구조적으로 대기업들에 의해 유지되고 성장해 온 게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재벌 위주의 경제 구조로 인한 양극화 심화는 이제 더 이상 용인하기 힘든 상황에 이르렀다.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가 화두로 떠오른 것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였다. 재벌 위주의 경제 구조로는 더 이상 국민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힘들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여야 후보 모두 경쟁적으로 경제민주화를 주창한 것은 이에 대한 일반 국민의 욕구가 그만큼 컸기 때문일 터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경제민주화 추진 동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그 여파로 국회에서의 경제민주화 입법도 줄줄이 뒤로 밀리고 있다. 박 대통령은 어제 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경제민주화 3대 원칙’을 제시했지만 알맹이는 빠졌다. 이는 기본적으로 경제민주화에 대한 박 대통령 자신의 인식 결여와 의지 부족 때문이지만 최근 대내외 경제 환경 악화도 크게 작용했다. 당장 경제가 주저앉을 판인데 재벌 때리기나 하고 있을 때냐는 감성적 호소가 먹혀들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과거의 실패를 되풀이할 뿐이다. 참여정부 때를 되돌아보자. 참여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사스, 북핵 문제, 소비 격감 등으로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 몰렸다. 지금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다급해진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석 달여 만인 2003년 6월1일, 이건희, 정몽구, 구본무, 김승연 등 재벌 회장과 손길승 전경련 회장을 청와대 옆 삼계탕집으로 초청해 점심을 함께 했다. 재벌 회장들은 투자 확대를 약속하며 규제 완화를 요구했고, 노 대통령은 노조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화답했다. 참여정부는 ‘법대로 원칙대로’ 재벌개혁을 했다고 하지만 재벌체제를 온존시켰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나락으로 떨어진 중소기업인과 영세 자영업자들의 원성은 2007년 대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경제대통령’을 표방하며 대선에서 압승한 이명박 대통령은 처음부터 재벌개혁이나 경제민주화 등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취임하자마자 고환율 정책으로 수출 대기업을 전폭 지원했고, 감세와 규제 완화로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하려 했다. 하지만 임기 중 연평균 성장률은 3%에도 못 미쳤고, 부의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됐다. 이른바 낙수효과를 기대하며 대기업 위주 성장 정책을 밀어붙였지만 역효과만 난 것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또다시 잘못된 길을 가려 하고 있다. 고환율·저금리 정책과 규제 완화 등을 통해 대기업들의 투자를 부추기면 경제가 살아날 것처럼 생각하지만 착각이다. 역대 정부들이 경제위기에 몰릴 때마다 눈앞의 성과를 위해 대기업에 매달렸지만 결과는 양극화만 심화되고 경제 활력만 떨어뜨렸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5년 뒤 경제 분야에서 성공한 대통령이 되려면 재벌 위주로 기울어진 우리 경제의 틀을 바로잡는 게 먼저다. 그래야만 장기적으로 경제가 살아난다. 그러기 위해 가장 확실한 수단이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를 기업 옥죄기로 보고, 모든 규제를 풀어 경제를 살리려고 한다면 이는 경제위기의 진단과 처방이 잘못된 것이다. 더욱이 창조경제로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겠다는 박근혜 정부가 경제민주화를 팽개치고 다시 재벌 위주 경제로 돌아간다는 것은 앞뒤가 전혀 안 맞는 얘기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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