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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곽병찬 칼럼] 박 당선인이 갈 길, ‘사람이 먼저다’

등록 2012-12-19 22:51수정 2012-12-19 23:16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이런 당부 하지 않기 바랐다. 이 나라가 더 이상 과거 악몽의 질곡에 매여 있지 않기를 바랐던 까닭이다. 박근혜 후보의 당선은 유신의 기억, 그 연장선상의 5공과 권위주의 정권의 악몽이 앞으로도 우리를 민주와 반민주, 평화와 냉전, 소외와 특권의 갈등 속에 잡아두리라 봤다. 반대로 박 후보의 낙선은 유신의 퇴장과 함께 그로 말미암은 트라우마도 치유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제 그 바람은 박 후보가 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사라졌다. 이제 그가 꿈꾸던 유신의 명예회복과 특권사회의 강화라는 악몽이 성큼 현실로 다가왔다. 불행하게도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오래된 싸움이 계속되어야 할 것임을 뜻한다. 이제 말하고 싶은 것은 오로지 하나, 오랜 세월 선한 이들을 괴롭혔던 그 악몽의 기억을 박 당선인이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화해와 통합을 이야기하는 그 역사적 희비극 앞에서 실소했다. 하지만 유권자가 그 손을 들어주었으니, 어찌하겠는가. 미봉책이라도, 기억의 공유가 역사적 상처를 치유하는 우회로가 되기를 바랄 수밖에.

독일의 미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학살의 기억은 인간의 야만을 남김없이 까발렸고, 신과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전복시켰다. 더 이상 사랑과 믿음을 노래할 순 없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들 역시 몸은 자유를 얻었지만, 평생 영혼은 그 악몽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했다. 그곳은 신뢰와 존중, 연민 등 인간 존엄성의 말살 현장이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이런 가치를 상실한 이들이 어떻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존자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가들은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인간에 대한 불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곤 했다. 작가 장 아메리는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프랑스 귀르 수용소에서 탈출한 뒤 레지스탕스 활동을 계속했던 그는 1943년 다시 체포돼, 생질(신트힐리스)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됐다. 주검으로 나오기까지 평균 3개월이었다는 수용소 생활을, 부헨발트, 베르겐벨젠 수용소를 거치며 2년 동안 요행히도 살아남는다. 이후 작가로 성가를 날렸지만 1978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밖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것은 하나의 구원이다.” 그것이 왜 구원인지에 대한 물음의 실마리는 1966년 펴낸 <죄와 속죄의 저편>에 나온다. “고문을 경험한 자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편하지 않다.”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레지스탕스 빨치산 활동을 하다 역시 1943년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그는 그곳에서 수용소의 야만을 전하기 위해, 오로지 증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소설가, 시인의 길을 걷는다. “그대들은 그동안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고통만으로는 정녕 부족하단 말인가./ 손가락 하나로 폭탄 단추를 누르기 전에/ 잠깐만, 아주 잠깐만 멈추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타인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아우슈비츠의 소녀’에서) 그의 증언은 계속됐지만, 1987년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유대인마저 그와 같은 야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인간 현실은 그를 절망케 했다. “세월이 흘러도 증오와 복수만 거듭되는 이 허망한 역사/ 나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울부짖는다네.// 아- 세월은 흘러가노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코끼리의 유언’에서) “그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 고통 너머 그 무엇,/ 그 무엇을 믿고 싶”었지만, 그런 믿음을 확인하기엔 악몽의 트라우마가 너무 컸다.

인간 존엄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 존엄의 파괴에 맞서 인간 존엄을 지키려 몸부림쳤던 선한 인간의 이야기다. 박 당선인이 인간 존엄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부채를 털고, 피해자의 멍에를 풀어내기 바란다. 그러자면 문재인 후보의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은 이제 당신이 들어야 한다.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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