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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곽병찬 칼럼] 위대한 약속

등록 2011-09-19 19:25

곽병찬 논설위원
곽병찬 논설위원
그 지겨운 장마와 늦더위 속에서도 가슴 한편에 서늘한 바람이 일곤 했던 것은 그 영화 탓이었다. 암전과 함께 ‘한 여인의 약속으로 시작된 위대한 여정’이라는 태그라인이 떠오르고, ‘불에 그을려 죽은 사람들’이라는 끔찍한 원제가 <그을린 사랑>으로 번안된 영화. 평가가 전율, 충격, 감동 일색인 보기 드문 영화.

기독교 집안인데 무슬림 청년을 사랑하고 아이까지 잉태하고, 가문의 수치를 우려한 오빠에 의해 애인은 살해되고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맡겨지고 자신은 야반도주해야 할 운명의 여인, 그는 핏덩이 앞에서 이렇게 약속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일을 저지르더라도, 너를 찾아오마. 사랑한다.”

여인은 학살과 보복 살육이 자행되는 사선을 넘나들며 아이를 찾아 헤매고, 무슬림과 그 아이들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고 출신을 배반하고 기독교 민병대 지도자를 암살한다. 수감되어 강간 등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강간의 결과로 쌍둥이를 낳는 비극 속에서도 그가 노래를 그치지 않았던 것은 그들 앞에서 정신을 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훗날 한 사내의 발뒤꿈치에서 아들의 표지를, 얼굴에서 고문기술자를 발견하고는 혼절한다.

여기서 끝났다면 영화는 종교분쟁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한편으로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다시 출발한다. ‘그’를 발견한 여인은 뜬 눈 그대로 정신을 놓고, 유언과 편지 3통을 겨우 구술하고는 세상을 뜬다. “아버지와 오빠를 찾는 날까지 나의 주검을 관에 넣지 말며, 벌거벗긴 채 세상을 보지 못하도록 엎어서 매장하라.” 약속이 완성된 날 뜯어보도록 한 편지에선 이렇게 말한다.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덕분에 마침내 약속을 지켜냈구나. 흐름은 끊어진 거야. 너희를 달랠 시간을 드디어 갖게 됐어. 자장가를 부르며 위로해줄 시간을. 너희들의 탄생은 공포 그 자체였지만, 그 배경은 위대한 사랑이었다.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 사랑한다.” 인간은 종교의 이름으로 신을 죽였고, 그런 종교를 거부한 여인은 약속의 완성을 통해 신을 되살렸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서늘한 바람이 일 때마다 내 가슴은 찔렸다. 지독한 가시밭길 끝에 얼마 전 떠난 이소선 할머니. 불에 타 죽어가던 아들, 그 아들과 한 약속,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넘나들던 삶! 그 치열한 삶이 나왈 마르완을 통해서나 떠오르곤 했으니, 나의 정신은 허구에 의해 이끌리고, 비현실에 의해 지배당하는 허위의식 바로 그것이었다. 나와 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몸을 던졌건만, 내 가슴속에서 그는 서늘한 바람이 아니라, 슬프게도 부담이었다.

불에 탄 아들은 죽어가면서 “엄마, 배가 고파”라고 말했다. 스무살 봉제공장 노동자의 삶과 절망이 농축된 말이었다. “어린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일은 해야 하는데,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되는데, 보다가 못 견뎌, 해보려고 해도 안 돼,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뚫리면, …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그러마, 그들 곁에 있으마. 한갓 촌부였던 그는 강철 같은 착취와 탄압의 구조에 온몸을 던지고 또 던졌다. 언제나 깨어지고 부서졌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박정희도 이 노래하는 여인을 막지는 못했다. 거기에 무슨 허위의식을 자극할 극적 반전, 환상적 요소가 있을 것인가.

세상의 집요하고 끔찍한 폭력들은, 바로 우리 곁에서 벌어진다. 너무 익숙해 눈치채지 못할 뿐이다. 인종 종교 이념의 거창한 폭력은 있다가도 사라진다. 그러나 눈먼 자본이 가하는 폭력은 시간 공간 체제의 제약이 없다. 유사 이래 중단된 적도 없는 이 땅의 평화를 질식시키는 장본인이다. 폭력의 시대, 신의 죽음을 극복하려 했던 위르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언약 속에 존재하는 신, 약속의 완성을 통해 드러나는 신을 말했다. 이소선의 약속, 나왈의 약속이 그것이다.

다시 약속이 쏟아진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거대한 사기도 쏟아진다. 온몸을 던진 그 위대한 약속이 그립고 또 그립다.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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