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석 논설위원실장
“언제든 열린 마음으로 북한과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3·1절 기념사) 이명박 대통령은 이 말에 어떤 ‘정책적 메시지’를 담으려 했는지 모르지만 별 효과가 없었던 것은 분명하다. 국민은 시큰둥했고, 북한 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은 지난 5일 ‘허무맹랑한 말장난’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내보냈다고 한다. 게다가 국내 일부 강경보수세력은 대화라는 말을 꺼낸 것 자체를 비판한다. 대북정책의 현주소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이명박 정부 대북정책은 아무것도 이룬 게 없다.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을 핵심 목표로 내걸었으나, 핵문제는 훨씬 더 나빠졌고 북한은 한·미·일의 경제봉쇄 속에서 중국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이전 정권에서 제한적으로나마 북한의 비핵화와 개방이 진전됐던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게다가 대북정책의 기초인 평화 관리조차 전혀 이뤄지지 못해 냉전시기와 다를 바 없는 ‘갈등의 일상화’가 굳어지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여름부터 애써 통일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데는 이런 대북정책 실패를 호도하려는 뜻이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북한이 굽히고 들어오기를 마냥 기다리는 ‘수주대토의 전략’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갈등만 불거지자, 기존 정책을 되돌아보는 대신 곧 통일이 올 것처럼 과대포장하는 것이다.
국민들도 비판적이다. 지난해 말 이후부터는 일관되게 대북정책에 대한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보다 높게 나타난다. 노무현 정부 대북정책과 비교해서도 ‘못한다’는 답이 갈수록 많아진다. 당연히 대북 접근 방식을 묻는 질문에도 대화가 압박을 앞지른다. 한마디로 국민은 정부가 빨리 대북정책을 바꾸기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들의 생각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현실론’이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거나, 섣부르게 북한 체제의 붕괴를 염두에 두고 밀어붙여 충돌하지 않기를 바라는 게 다수 국민의 마음이다. 물론 여러 사건이 잇따르면서 북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 또한 커졌다.
가장 큰 문제는 정부 대북정책이 국민들의 인식보다 훨씬 근본주의적이라는 데 있다. 정부 관계자들은 여전히 북한을 협상 상대가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고위관리들이 심심찮게 언급하는 급변사태론이나 북한붕괴론도 객관적인 사실로 뒷받침되기보다 선악 판단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아울러 일부 정부 관계자들은 최근 진행되는 아랍 시민혁명에 상당히 고무돼 북한 체제의 조기붕괴를 확신한다. 이들은 나아가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근본주의자가 되기를 은근히 요구한다. 이런 분위기를 통틀어 ‘대북정책의 종교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용주의를 내걸었던 정부가 여러 분야에서 자기확신에만 사로잡혀 독주를 계속하는 걸 보면 안타깝기까지 하다.
믿음이 합리적 판단을 대신해서는 안정적이고 현실적인 대북정책이 들어설 여지가 아주 좁아질 수밖에 없다. 임기가 끝날 때까지 남북 갈등이 지속되면서 이명박 정부는 결국 ‘핵문제와 남북관계를 크게 악화시킨 정권’으로 남게 될 것이다.
과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그랬듯이 이 대통령이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정책 전환이 가능하다. 출발점은 대화와 협력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부는 북쪽이 남쪽과 대화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뭔지를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쌀과 비료 등 인도적 지원 재개가 필수다.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6자회담도 북쪽의 대남 의존도가 높을 때 더 성과가 있었다.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은 한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꾸준한 상호과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기존 대북정책은 유효성을 잃은 지 오래다. 새출발을 하려면 정부내 논의의 폭부터 넓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참모들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는 힘이 세고 용기가 뛰어났다. 그가 노나라 실권자 계씨 집안의 지배인이 됐다. 이때 계씨 쪽에서 공자에게 물었다. “자로는 큰 신하(대신)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공자가 대답했다. “비리(잘못)를 지적하지 못하니 그저 가신(家臣)일 뿐이지요.” 실패한 기존 정책을 묵묵히 추종하면서도 가신이 아니라 ‘큰 관리’라고 할 수 있을까. 논설위원실장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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