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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 칼럼] “트럼프라서 될 수 있다”

등록 2019-09-18 15:20수정 2019-09-19 13:38

비핵화 협상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트럼프의 동기가 커지고 있다. 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진전’을 목표로 삼는다면, 내년 말 미국 대선 이전에 많은 성취가 가능하다.
적어도 북한 핵 문제에 관한 한 ‘트럼프라서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김지석
대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몇달 전 ‘볼턴은 3개의 전쟁을 시작하기를 바란다’고 한 바 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전쟁을 벌이려 한 나라가 궁금하다면, 두 곳은 확실하다. 이란과 베네수엘라다. 베네수엘라는 그가 쿠바, 니카라과와 함께 ‘폭정의 트로이카’로 꼽고 정권교체를 시도한 나라다. 볼턴이 지난 10일 전격 경질돼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무력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이란은 다르다. 그가 없더라도, 전면전은 어렵겠지만 국지전·제한전은 일어날 수 있다. 사우디 석유시설에 대한 드론 공격은 불길한 징조다.

나머지 한 나라는 북한 또는 러시아다. 정권교체 시도에 주목하면 북한이고, 크림반도 병합과 우크라이나 내전 개입에 대한 응징을 중시하면 러시아가 된다. 볼턴의 퇴장으로 미국-북한, 미국-러시아 군사충돌의 그림자도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그런데 트럼프가 볼턴을 밀어낸 핵심 계기는 의외로 미국과 아프간 무장반군 탈레반의 평화협정 문제다. 그 의미가 뭘까? 트럼프 대외정책의 두 축인 미국 중심주의와 네오콘(신보수주의 또는 신보수파)의 충돌이다.

미국 중심주의의 기본 성격은 경제 국수주의다. 핵심 상대가 중국이다. 트럼프는 아프간·이라크 등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며 돈을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네오콘은 무력을 앞세운 패권 유지·강화를 추구한다. 이들에게 중동 지역은 사활적 이해가 걸린 곳이다. 양쪽은 전통적인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 기조만큼이나 거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전 버락 오바마 정부의 정책을 무너뜨리기 위해 손을 잡았다. 이제 트럼프 임기 말로 들어가면서 양쪽 사이 틈이 커진다. 미국 중심주의가 현실에 뿌리내리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북한 핵 문제 해법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비핵화 협상에서 성과를 내겠다는 트럼프의 동기가 커지고 있다. 그가 볼턴 경질 직후, 지난해 볼턴이 리비아 모델을 언급해 협상을 어렵게 했다고 밝힌 것은 지나가는 말이 아니다. 비핵화 협상은 대중국 공세와도 방향이 맞는다. 북-미 관계가 개선되고 북한이 중국에 기대려는 동력이 약해질수록 중국도 부담을 크게 느끼기 마련이다. 북한은 모든 문제가 풀릴 때까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겠지만 말이다.

미국과 북한이 확인했듯이, 이달 말쯤 양쪽 실무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입장 차이는 아직도 작지 않다. 영변 핵시설 폐기를 넘어선 추가 조처와 일부 제재 완화를 포함한 초기 동시행동의 내용, 비핵화 정의에 대한 합의를 전제로 한 청사진(로드맵) 마련이 핵심이다. 양쪽의 의지는 강하다. 또한 이전의 실패를 통해 상대 입장을 잘 파악한 만큼 협상이 난항을 겪더라도 금방 결렬되지는 않을 것이다.

충분한 성과를 내려면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먼저 미국이 조급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와 관련해 최근 트럼프와 고위 관리들이 한발 뒤로 물러난 태도를 보이는 것은 긍정적이다. 북한 또한 상황 변화에 신속하게 응답해야 한다. 북한이 일관되게 얘기하는 것은 제재 완화·해제와 체제 안전보장이다. 합리성 있는 요구이지만, 한꺼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 더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촉진자·중재자의 과감한 행동이 필수다. 물론 한국이다. 복잡한 비핵화 과정을 인내심 있게 끌고 갈 의지와 동력, 창의성을 보여줄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다음주 한-미 정상회담이 출발점이다. 이후 남북 정상회담과 북-중 정상회담 등이 이어질 수 있다.

‘트럼프 리스크’라는 말이 있다. 트럼프의 즉흥성과 예측불능성, 미국 내 정치 변수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를 확대해 ‘트럼프라서 핵 문제 해결은 어렵다’고 주장하는 이가 적잖다. 일면적 평가다. 트럼프는 핵 문제에서 갈수록 현실주의자가 되고 있으며, 다른 어떤 미국 대통령보다 예측 가능한 일관된 모습을 보인다. 북한 또한 비핵화 협상과 미국에 대한 태도에서 일정한 선 안에서 움직인다. 핵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진전’을 목표로 삼는다면, 내년 말 미국 대선 이전에 많은 성취가 가능하다.

적어도 북한 핵 문제에 관한 한 ‘트럼프라서 될 수 있는’ 상황이다.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jkim@hani.co.kr

* 필자의 정년퇴임으로, 칼럼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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