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서사는 대부분 실패한다. 내밀한 사생활을 파먹으며 인기를 끄는 작가들은 많지만 에피소드는 금방 말라붙기 마련이다. 나중에는 사건과 감정을 신비화하거나 심지어 발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수치를 쓰는 일은 심리학적 개인으로서 콤플렉스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자기 분석이 곧 사회 분석임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박권일ㅣ사회비평가
올해 읽은 책 중 가장 좋았던 건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였다. 에리봉은 미셸 푸코 평전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비평가다. 동성애 의제에 활발히 개입하는 게이 지식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사회학의 거장 피에르 부르디외의 사유가 짙게 배어 있긴 하지만, 학술적 형식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야기다. 그러나 다 읽고 나면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감탄하게 된다. 무엇보다 큰 장점은, '나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랭스는 에리봉의 고향으로, 가난한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다. 그의 가족은 전형적인 프랑스 노동계급이다. 에리봉은 가족들이 학교와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떠올린다. “나는 의무교육 연령이 16세까지로 연장되었을 때 가족이 얼마나 분개했는지 기억한다. 뭣 하러 애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억지로 계속하게 만드는 거야? 애들은 오히려 일을 하고 싶어 한다고.”(54쪽) 이런 분위기 속에서, 명석하고 예민했던 한 소년이 자신의 지적 욕망과 성장 환경 사이에 놓인 괴리를 날카롭게 인식하지 않을 순 없었을 테다. 게이를 향한 노동자들의 일상적 비하와 멸시는 그를 더 아프고 서럽게 했다. 모든 고통의 중심에는 강렬한 수치심이 있었다. 에리봉은 하루빨리 랭스를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파리로, 대학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탈출’하는 데 성공했고 파리 지식인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흔한 출세담이다. 성공한 사람들이 떠나온 고향을 잊거나 지우는 일은 드물지 않다. 또 그들이 고향에 다시 찾아와 자신이 어떻게 역경을 헤치고 이 자리에 섰는지를 회고하는 일은 그보다 더 흔하다. 힘들었던 과거는 납작하게 짜부라져 단지 성공을 설명하는 수단이 된다. 에리봉은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늘 자신을 괴롭혀온 불편한 감정들을 정직하게 마주한다. 그는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고요히 가라앉은 감정과 기억들을 다시 들쑤셔 올린다.
이 과정에서 에리봉은 자신의 수치심이 특수하고 고유하며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인 감정이자 권력게임의 일부임을 보인다. 노동자 부모의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가족들의 생활방식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고,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말투를 모방하는 것, 곧 사회적 우열과 위계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폭력이다. 지배집단의 욕망과 의식을 내면화함으로써 피지배자는 적극적으로 체제의 질서에 예속된다. 하지만 에리봉은 자신에게 가해진 상징폭력을 파헤치면서도 섣불리 노동계급의 신화로 회귀하지 않는다. 그는 지배계급을 비난하고 노동계급의 편을 드는 대신 한때 좌파였던 가족들이 오늘날 마린 르펜 같은 극우 정치인을 지지하는 현실을 담담히 보여준다.
자기 서사는 대부분 실패한다. 내밀한 사생활을 파먹으며 인기를 끄는 작가들은 많지만 에피소드는 금방 말라붙기 마련이다. 나중에는 사건과 감정을 신비화하거나 심지어 발명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런 개인의 특권화는 자서전(autobiography)식 글쓰기의 한계다. 반면 소수의 탁월한 자기 서사는 대개 자기기술지(autoethnography)에 가까워진다. 그것은 치열한 자기 분석이다. 그리고 “모든 자기 분석은 일종의 수치전(honto-biographie)”(329쪽)이다.
수치를 쓰는 일은 심리학적 개인으로서 콤플렉스를 늘어놓는 게 아니라 자기 분석이 곧 사회 분석임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이는 용기와 지성을 모두 요구한다. 그러고 보니 한국어로 쓰인 곡진한 자기기술지가 있었다.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다. 저자는 에리봉보다 더욱 구체적인 언어로, 이를테면 ‘오줌권’이라는 말을 통해서 장애인이 일상에서 겪는 억압이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논한다. 냉소하고, 절망하고,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김원영은 끝내 ‘나’라는 개인을 특권화하거나 신비화하지 않았다.
당신의 수치들이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너무 치명적인 것 말고, 자잘한 것부터 시작해보자. 나의 수치스러웠던 기억 중 하나는 지금껏 만난 연인들이 모두 표준어 구사자였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왜 나는 부산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서울말 쓰는 여성만을 좋아했을까? 구체적 분석은 다음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