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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가족’을 허하라

등록 2021-05-20 18:38수정 2021-05-21 02:34

[비온 뒤 무지개] 한채윤 l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두명의 여고 동창생이 있었다. 둘은 여고를 졸업한 후부터 함께 지냈다. 한 사람은 직장을 다녔고 또 한 사람은 집안 살림을 맡았다. 그렇게 40여년을 보내며 60대에 접어들었는데 한쪽이 병으로 쓰러졌다. 간병을 열심히 했지만 큰 수술에는 혈연 가족의 동의가 필요했다. 평소 왕래가 없던 먼 친척이 나타났고, 동시에 아픈 분의 아파트, 보험, 예금 등의 권리도 그 친척의 몫이 되었다. 자신이 살던 집에서 계속 살려면 갑자기 나타난 친척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기막힌 처지가 된 것이다. 삶의 터전을 지키려 싸웠지만, 도리어 받게 된 법적 처분은 집에도, 병원에도 오지 말라는 접근 금지였다. 결국 40년을 함께한 이의 임종도 지켜볼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그분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2013년에 있었던 일이다.

이런 사례만 있는 건 아니다. 50대의 레즈비언 커플 중 주택 명의를 가진 파트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돌아가신 분의 가족들이 집을 처분하려 했으나 오랜 시간 그 가족들과도 왕래를 하며 지냈던 친구들이 겨우 설득해서 남겨진 분이 그 집에서 계속 살 수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레즈비언 커플의 경우엔, 부모님들에게 커밍아웃을 못 했으나 형제들은 모두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어서 그 형제들이 부모님을 설득해 남은 분에게 유산 상속이 이루어지도록 했다는 사연도 들은 적이 있다. 설득의 핵심은 ‘두 사람이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보라, 가족과 다를 바 없음을 알지 않느냐, 그러니 내쫓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감동적인 사연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칭송받을 미담으로 남길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의 권리가 주변 사람들의 선의에 의해서 지켜지길 기대하며 평생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함께 산다는 것, 살림을 합친다는 것은 은밀한 사생활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내 인생에서 소중한 가치가 있는 ‘관계에 대한 존중’을 공적으로 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존중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건 바로 국가다. 법과 제도로 뒷받침이 되어야 누구든, 어떤 상황에서든 그 존중을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녀 간의 결혼만이 신성하며 동성 결혼은 인정할 수 없다고 극렬히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나는 왜 이토록 결혼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되진 않지만 그래 좋다, 결혼은 이성 간에만 하는 것으로 두자. 다만 무언가를 지키려고 한다면 응당 대신 내어주는 것도 있어야 옳다. 공동의 자원을 혼자 양손에 다 움켜쥐고 타인이 고통받든 말든 모른 척하는 것은 ‘못돼 처먹은’ 일이라고 초등학교 때 배우지 않았는가. 결혼 제도 바깥에 놓인 사람들이 더 큰 슬픔과 고통을 겪을수록 결혼이 고귀해진다고 믿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 반대할 이유가 없다. 결혼의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결혼 외의 선택지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외국에서는 1990년대부터 이미 시행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도 이미 2014년에 ‘생활동반자법’이 제안되었다. 항간의 오해와 달리 동성애자만을 위한 특별법은 아니다. 동성 간이든 이성 간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상관없다. 다만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경제적인 공동체로 일상을 영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법적 안전망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정부가 작년에 발표한 ‘가족 다양성에 대한 인식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69.7%가 ‘혼인·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실혼 등 법률혼 이외의 혼인에 대한 차별 폐지’ 찬성도 70.5%였다. 국민 10명 중 7명의 의견이 이러하다면 국회에서 ‘생활동반자법’에 대해 논의할 당위는 충분하다. 지자체는 조례를 만드는 것부터 시도할 수도 있다. 그동안 결혼이 독점해온 가족을 구성할 권리에 대한 상상력을 넓히면 가능하다. 생활동반자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결혼이 사라지진 않는다. 비극이 사라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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