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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용석의 언어탐방] 패러다임: 지팡이가 설 곳

등록 2021-04-20 15:56수정 2021-04-21 02:36

축적적 사고에 매여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존의 기반 위에서 뭔가 하려 한다. 곧 ‘기반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혁명 역시 기반을 전제한다. 혁명은 기존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쿤도 과학혁명을 가져오는 패러다임 전환은 전적으로 “재건 사업”이라고 했다. 이런 전환은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과 같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ㅣ 철학자

어려운 학문적 술어를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는 것을 보면 신기할 때도 있다. 아마도 ‘패러다임’(paradigm)의 일상적 활용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패러다임은 ‘고대의 언어 창고’에 있던 말이다. 그것이 20세기 중반 과학적 인식론의 전문 술어가 되었고, 이어서 오늘날 일상 언어로 활용되고 있다.

패러다임은 고대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에서 유래하는데, 플라톤 철학의 핵심 술어 가운데 하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도 활용되었다. 플라톤은 그 말로 조물주가 우주를 만들 때 ‘본으로 삼은 것’을 비유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예시’의 의미로 사용했다. 현대 언어학은 이 말을 언어 학습에서 문법의 ‘전형적 범례’라는 뜻으로 차용했다.

그 어떤 경우든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따라야 할’ 그 무엇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일상용어로도 사람들의 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이론의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패러다임이란 말이 이렇게 폭넓게 유행하게 된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토머스 쿤이다.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1962년)는 ‘패러다임 전환’(paradigm shift)이라는 개념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그것은 과학계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의식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쿤이 주장하는 바를 살펴보아야 한다. 패러다임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할 만큼 책의 내용이 잘 알려져 있겠지만, 그래도 잠시 일상을 떠나 전문 영역을 탐방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쿤은 과학의 변화 또는 발전이 과학 지식의 ‘축적적’ 성과가 아니라, 비연속적 또는 ‘혁명적’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과학혁명이란 하나의 옛 패러다임이 이와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전반적 또는 부분적으로 대체되는 비축적적(non-cumulative)인 변화의 사건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혁명과 혁명 사이에 과학 활동이 ‘안정된 패러다임’에 의존하는 시기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시기이다. 정상과학이 심각한 이상 현상의 빈번한 출현을 설명하지 못하는 위기를 맞게 되면 과학혁명이 불가피해진다.

정상과학을 특징짓는 것은 당연히 패러다임이다. 무엇보다도 패러다임은 정상과학의 시기 동안 ‘과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제공하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을 공유하면서 그것이 제시하는 연구 주제와 방법론을 활용한다. 곧 패러다임에 맞추어서 과학적 성과의 마무리 작업을 한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은 순수하게 발견되는 게 아니라, 패러다임에 맞춘 과학적 성과로서 제시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생각은 쿤 이전에도 있었다. 패러다임이라는 술어와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20세기 전반 양자역학의 등장과 함께 고전물리학의 체계가 흔들리면서 과학적 지식이 비축적적이라는 사고의 단초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양자론 발전에 공헌한 하이젠베르크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기존에 확립된 자연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과학의 진보는 반드시 누적적이라고 할 수 없다. 뉴턴의 개념이 그것에 ‘맞추어진’ 역학 현상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어떤 새로운 현상은 그 현상을 위해 짜 맞춘 새로운 개념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자연과학은 자연에 대한 실험적 지식이 점진적으로 누적된 필연적 결과”임을 믿는 것이 기존 과학의 허점임을 지적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사고의 전환이 우리 일상생활에 가져온 문명사적 의미이다. 쿤의 사상을 대표하는 말들은 패러다임 전환, 정상과학, 과학혁명 등이다. 그러나 시각을 약간 바꿔서 보면, 그 핵심 개념이 기초 또는 ‘기반’(fundamental)임을 알 수 있다. 흔히 쿤의 사상을 해석할 때, ‘축적’과 ‘혁명’을 대립 개념으로 놓는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기반이란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축적하기 위해서는 기반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 어떤 바탕 위에서 뭔가 쌓을 수 있다. 축적적 사고에 매여 있는 사람은 반드시 기존의 기반 위에서 뭔가 하려 한다. 곧 ‘기반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혁명 역시 기반을 전제한다. 혁명은 기존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쿤도 과학혁명을 가져오는 패러다임 전환은 전적으로 “재건 사업”이라고 했다. 이런 전환은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과 같다. 곧 ‘지지 기반’을 확 바꾸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개념은, 쿤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기반 위주의 세계관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기반을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그 기반부터 뒤집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뒤집기는 결코 쉽지 않다. 패러다임 전환은, 뭔가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적대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너무도 친숙했고 철저히 습관 들어 있던 것을 대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팡이의 은유는 기반을 뒤집을 필요성과 함께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흔히 쿤의 이론은 자연과학 이외의 분야에서 더욱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말이다. 문화, 사회, 경제, 정치 등 인간의 역사가 패러다임 전환적인 변화를 겪는다는 데서 오히려 쿤이 과학 발전을 설명할 수 있는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 밖에서 그 이론에 크게 호응한 것은 쿤이 빌려온 연장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을 때, 원주인이 연장의 쓰임을 새삼 발견하고 좋아한 격이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근본적 변화에 접근하는 방법이 쿤의 과학적 인식론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패러다임 전환이 임박한 시점에 있다. 기후변화와 팬데믹(자연), 성장의 한계(경제), 강요된 비대면 소통(사회), 사람들의 욕구불만을 이용하는 포퓰리즘의 확산(정치), 이 모든 것들은 서로 긴밀히 연계된 위기 요소이다.

이제 총체적 변화가 필요한 시기다. 곧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굳건히 지지하고 있는 인식적·행태적 기반이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의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상에서부터 우리 삶을 바꿀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해야 한다. 쿤은 이 말을 쓰지 않았지만, ‘패러다임의 준비’는 마치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꾸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지난한 탐구의 과정을 거친 것처럼 ‘지금 바로’ 시동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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