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 철학자
슛! 골! 손흥민 선수가 멋지게 감아 찬 공이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오프사이드로 취소되었다. 다음 골도 그랬다. 중계를 보는 사람도 열받는데, 그는 시합 후에 차분히 말했다. “공격 템포를 잘 조율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축구 경기에서 상대 팀의 오프사이드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템포가 중요하다. 다른 스포츠 종목들에서도 경기 운영 템포는 중요하다.
템포(tempo)는 이탈리아어로 시간이란 뜻이다. 음악에서는 ‘악곡을 연주하는 속도’를 가리키는 말로 쓴다.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는 각 나라말마다 다르지만, 악곡 진행 속도를 표현할 때는 대체로 이탈리아어로 정리된 일군의 ‘속도 표어’ 또는 빠르기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라르고, 알레그로, 비바체, 프레스토 등이 그렇다.
이탈리아어에서는 템포라는 한 단어로 일상 용어로서의 시간과 음악 술어로서의 속도를 모두 가리킨다. 이탈리아어에서 속도 또는 빠르기를 뜻하는 말은 ‘벨로치타’라고 따로 있다. 그럼에도 템포라는 단어를 특별한 분야에서 속도를 뜻하는 말로 사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듯싶다. 아마도 속도란 시간 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인식 때문이리라. 속도는 시간을 전제하고 시간은 속도로 구체화된다.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과제인 ‘시간의 활용’이라는 것도 사람들의 행위 속도로 구체화된다. 속도를 내면 시간이 줄어들고, 속도를 줄이면 시간이 늘어난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빠름과 느림이라는 삶의 과제는 실존적 담론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사반세기 전 정보기술(IT)로 대표되는 디지털 문화가 가져온 것은 개별 기술의 속도보다도 우리 삶 전체에 몰고 온 변화의 속도였다. 내 표현대로 하면 급속한 ‘변화를 앞세운 시대’가 본격 개막되었던 것이다. 인공지능(AI) 기술로 대표되는 오늘날 이런 시대적 특징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
당시 급속한 변화에 부대끼던 사람들은 이런 삶의 속도에 저항하여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열정적으로 찾았다. 시대의 현자들은 느림을 실존적 인생관으로 설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느림을 주장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느림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엄청 분주하고 느림 전시회에 가느라 서둘러야 하며 아이들까지 인기 있는 느림 캐릭터와 팬시상품들이 동나기 전에 사러 가느라 재빠르게 움직인다. 시대의 화두 따라잡기와 유행 따라 담론하기에 지성인들 사이에서도 느림은 실종된다. 어제 모두 “생각의 속도”(빌 게이츠)를 논하느라 바빴는데, 오늘 ‘느림의 의미’를 논하느라 바쁘다. 느림의 주장과 느림의 추구에 느림이 없다. 그런 느낌이었다. 느림의 주위에, 아니 그 중심에 거센 빠름의 기운을 느꼈다.
문명의 바쁨과 소란스러움은 자연의 한가함과 고요함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법인데, 혹자는 이를 과장해서 대립적 세계관을 설정하기도 했다. 바쁨은 인간의 몫이고 한적함은 자연의 몫이라는 고정관념이 그렇다. 자연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많은 빠른 움직임들이 있는지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소설 ‘느림’을 쓴 밀란 쿤데라는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라고 묻고는 “자연과 더불어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라며 한탄했다. 그 역시 자연은 느림의 세계라는 고정관념에 붙들렸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생명체들도 살기 바쁘다.
나아가 느림의 선생들이 제시하는 느림의 지혜들은 참 매력적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당수 그림의 떡이었다. 고급스러운 권태, 한가로이 거닐기, 포도주 즐기기, 글쓰기 등 웬만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것들이다. 멋진 고성(古城)을 찾아 옛 현인들의 삶을 상상하며 느긋하게 밤을 새우는 그런 낭만적 느림의 기회는 서민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느림의 가르침에, 함께 나눌 수 있는 느림은 없었다.
왜 이런 시대적 아이러니가 발생했을까. 빠름과 느림을 이분법으로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빠름의 세계관을 내세우거나 느림의 인생관에 집착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지금도 또 미래에도 반복될 수 있다. 그러나 빠름과 느림 사이에는 ‘엔(n)개의 각기 다른 속도’가 있다. 자연에도 문명 세계에도 수천수만 가지 다른 속도를 내는 삶이 공존한다. 그런 속도의 삶은 실체적이다.
토마스 만은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이렇게 답했다. “시간은 비밀이다. 실체가 없으면서 전지전능하다.” 이는 고대의 성자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말의 현대 버전이다. 그는 시간에 대해 “아무도 묻지 않는 한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고 설명해야 한다면 나는 모른다”라고 말했다. 이미 수많은 학자들이 논했듯이 시간은 인간의 상상이고 관념이며 신비일지 모른다. 아니면 물리학자 존 아치볼드 휠러의 말처럼 “시간은 모든 일이 한꺼번에 발생하는 사태를 막아주기” 위해 있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실체는 없지만 세상일을 관장하고 있다.
시간을 빨리 가고 늦게 가게 할 수 없기에 인간은 속도를 내거나 줄이면서 수많은 과업을 수행한다. 때로는 한꺼번에 많은 일을 빨리하려다가 휠러가 상상한 ‘시간의 근원적 기획’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시간은 무한히 제공되지만 속도는 유한한 인간이 조정해야 한다. 시간은 영혼이 포착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속도는 육체가 경험한다. 속도의 정도에 따라 육체는 다르게 반응한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실체가 없을지라도 속도는 실체가 있다. 그러므로 속도 조율은 우리 일상의 과업이다.
템포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그 기원이 음악 술어였기에 이 단어에는 단순한 속도감 이상으로 특별한 뉘앙스가 있다. 템포는 가장 느린 라르기시모에서 가장 빠른 프레스티시모에 이르는 속도 스펙트럼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스포츠에서, 비즈니스에서, 정치행위에서 그리고 개인의 일상에서 템포를 조율한다는 것은 그 스펙트럼 가운데서 적절한 것을 골라 적용한다는 뜻이다. 각자 상황과 대상에 따라, 아다지오를 쓸지, 안단테로 갈지, 모데라토로 할지 능수능란한 활용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것도 좋으리라. 우리 일상에도 희망과 의지를 꺾는 오프사이드 함정들이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