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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코즈모폴리턴] 우리는 모두 치매를 앓을 수 있다 / 조기원

등록 2021-04-01 13:35수정 2021-04-02 09:29

조기원ㅣ국제뉴스팀장

크리스틴 브라이든(72)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에게 과학기술분야를 조언하는 전도유망한 관료였다. 그는 46살이었던 1995년 ‘알츠하이머성 치매’ 진단을 받았다. 6년 뒤인 2001년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열렸던 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 국제회의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대중 앞에서 발언한 극히 드문 사례였다. 그는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내가 처음 (대중 앞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내가 이야기를 할 수는 있으니 치매에 걸렸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고 말했다. 치매에 걸리면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는 편견이 2000년대 초반에도 여전했다는 이야기다. 치매는 건망증이 심하지만 약간의 도움을 받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수준부터 누군가의 도움을 계속 받아야 하는 경우까지 정도가 매우 다양하다.

그의 고백 이후 치매에 걸린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일이 늘기 시작했다. 2004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 국제회의 때는 일본인 오치 슌지가 연단에 올랐다. “잘 잊어버리지만 여러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안심하고 보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천천히 말했다. 편견과 싸웠던 이런 이들의 노력 때문에 세계 각국 정부들이 치매 관련 정책을 펼 때 가족의 어려움뿐 아니라 당사자의 생각을 들으려는 노력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치매는 특정 질병의 이름이 아니다. 기억력 또는 사고력이 일상생활 수행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과 연관된 다양한 증상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용어다. 1907년 독일 정신과 의사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가 환자 뇌 조직의 병리학적 변화를 관찰해 발표해 치매에 대한 의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아직 정확한 치매 발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치매를 일으키는 원인 질병은 단백질의 뇌 침착과 관련이 있는 ‘알츠하이머’가 70~80% 정도지만, 혈관성·알코올성 등 다른 원인도 100가지가 넘는다. 확실히 증명된 예방법은 없고, 완전한 치료약도 없다. 고령자에게 많이 발생하지만 젊은 나이에도 앓을 수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세계적으로 치매를 앓는 이가 5000만명이며 해마다 거의 1000만명에 육박하는 환자가 새로 나온다고 추정한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한국 60살 이상 치매환자는 86만명이 넘는다. 한마디로 누구나 치매를 앓을 수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가 선거 유세 때 문재인 대통령을 “중증 치매환자”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31일 관훈토론회에서 “이런 표현도 쓸 수 없다면 도대체 어떤 (표현으로) 강력한 비유를 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다만 “이 시간 이후로 그런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야당이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환자와 가족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을 비유라며 정당화할 수는 없다. 치매환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편견도 키울 수 있다.

2019년 도쿄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치매 간호’ 심포지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발표자로 나온 다카사와 다모쓰가 한 말이 생생하다. 그의 아내는 인지증(일본에서 치매가 모욕적인 표현이라는 이유로 변경한 명칭) 진단을 받았다. 2006년 아내의 물품을 정리하던 그는 “외톨이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적힌 메모 수십장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당사자들의 막막함과 외로움이 얼마나 클지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선거 때마다 치매를 포함한 각종 질병을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비하의 도구로 삼는 행태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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