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오피니언 부국장
신문은 귀했다.
지난해 9월, 영국 유력일간지 <가디언> 최신호 실물을 참고할 일이 있었다. 대형서점 외국 간행물 코너에 문의하면 쉽게 구하겠지 싶었다. 알아보니, 그곳에선 미국 신문만 딱 두 종류 취급한다고 했다. 후배가 주한영국대사관과 영국문화원에도 연락을 취했다. 열람이나마 가능할 줄 알았다. 두 기관 모두 “<가디언>을 종이신문으로 구독하거나 비치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런던에 사는 교포를 수소문해 신문을 사게 한 뒤 국제특급우편으로 받는 방법을 택했다. 외국 신문이지만, 이렇게 귀할 줄 몰랐다.
지난 1년 동안 콘텐츠개편팀장을 겸직했다. 이전 3년간 편집국 바깥으로 떠났다가 돌아와 맡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비교적 현실이 명징하게 보였던 것 같다. ‘콘텐츠개편’이라는 화두에 반응한 나의 첫마디는 불경하게도 ‘너 아직도 신문 보니?’였다. 한달 뒤 실제로
이 말을 제목으로 삼아 칼럼을 썼다. 그다음에도
‘신문을 버리며’라는 삐딱한 제목의 칼럼을 썼다. 냉정한 자기객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팀원들은 국내외 레퍼런스를 뒤지며 보고서 작성에 들어갔다. <가디언>은 여러 레퍼런스 중 하나였다.
신문에 관해 쓴다. 멸종과 진화의 갈림길에 관해 쓴다. 냉소와 희망, 박제와 혁신의 경계 그 어딘가에 선 레거시 미디어의 운명에 관해 쓴다.
3개월 전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행한 <2020 언론수용자조사>를 읽었다. 업데이트된 종이신문 이용률과 하루 이용시간을 여기에 인용하려다가 꾹 참는다.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또 몇 포인트 떨어졌더라는 ‘추락 타령’이 진부해서다. 그래프의 기울기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런데 통계치를 해설하는 문장이 예년보다 잔인하게 눈을 찔렀다. “종이신문은 언론수용자 조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급격하게 쇠락한 매체로, 약 20년 전에는 조사 참여자의 대다수가(1993년 이용률 87.8%), 10년 전에는 절반이(2010년 이용률 52.6%) 종이신문을 이용했으나 이제는 열명 중 한명 정도만….” 잔인했지만, 충격적이진 않았다. 내가 속한 콘텐츠개편팀이 지난해 10월 한겨레 내부 구성원을 대상으로 발행·배포한 보고서 기조도 나름 충격과 자극성을 탑재했다. “그러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이제는 잔도를 불살라야 합니다. 백도어가 있다면 닫아야 합니다.” 잔도란 종이신문 제작 중심의 콘텐츠 생산구조와 공정을 뜻한다. 심하다. 잔인하게 불살라버리라니.
오래된 문제의식이다. 한겨레는 7년 전인 2014년 한국언론 사상 처음으로 디지털 전환을 골자로 하는 ‘혁신보고서’를 낸 바 있다. 이 보고서는 한겨레 편집국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종이신문에 적합한 양식, 문체, 문제의식만 담긴 기사를 찾아 발제/ 지면회의에서 기사 할당되길 기다리고, 할당되면 그만큼의 기사만 작성하고, 기사 배정이 없으면 쓸 기사가 없다고 생각/ 기사만 잘 쓰면 독자는 자연히 찾아서 읽는다고 생각.”
<뉴욕 타임스>가 혁신보고서를 발표한 해도 2014년이다. 이후 혁신보고서는 전통 매체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뉴스룸도 바뀌었다. 기존 편집국을 두개로 쪼개는 신문사가 생겨났다. “신문에 쓰는 기사를 더 공들여 쓴다는 관행은 타당하지 않다”고 기자들을 교육하는 신문사가 생겨났다. 편집국장이 종이신문을 들여다보는 간부에게 “신문 좀 작작 보라”고 질책하는 신문사가 생겨났다.
한겨레는 지난해 10월 젠더·기후변화·콘텐츠기획팀을 디지털콘텐츠부 소속으로 배치했다. 테크·스프레드팀을 신설했다. 12월부터 정치부는 신문 제작공정을 분리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앞서 언급한 콘텐츠개편팀 보고서의 연장선에서다. 그리고 지금, 한발 더 나아가기 위해 신발끈을 맨다.
한겨레는
‘휘클리’라는 신문을 낸다.
‘H:730’이라는 신문도 낸다.
모바일 홈피도, 앱도, 푸시(앱 알림)도 신문이다. 한겨레는 조간이자 중간, 석간, 심야간 신문이다. ‘페이퍼’는 뉴스공장 한겨레의 여러 플랫폼 중 하나가 돼가지만, 정작 만드는 사람이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종이독자 홀대’라 하면 논쟁이 필요하다. 한겨레는 조용히 소용돌이 지점을 통과 중이다. ‘더 귀한 신문’을 위해 진화 중이다.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