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ㅣ 오피니언 부국장
독자 모독으로 비칠까 조심스럽다. 셀프 모독이라 여기며 이 글을 쓴다.
한 달 전부터 15명의 대학생들과 매주 만난다. 25살 안팎의 고학년들이다. 얼굴을 마주하지는 못한다. 원격 소통이다. 첫날 물었다. “집에서 신문 구독하는 사람?” 서너 해 전만 해도 10명 중 2명 정도가 (부모님이 신청해) 신문을 본다고 했다. 아무도 없었다. 또 물었다. “정말 아무도 없어요?” 낯뜨거운 침묵이 돌아왔다. 여기에 힌트를 얻어 다음과 같은 주제로 글쓰기 과제를 냈다. ‘오늘의 미디어- 너 아직도 신문 보니?’ 주변 종이신문 보는 사람을 찾아 인터뷰를 한 뒤 우리 시대의 미디어에 관한 생각을 담아보라고 했다.
일주일 뒤 학생들이 보내온 글을 읽으며 웃었다. 너무 웃었다. 슬프고 잔인한 메시지인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자해개그 대본을 선물 받은 느낌이랄까. “‘너 아직도 신문 보니?’라는 질문보다는 ‘너 신문을 본 적은 있니?’라고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대목에서 한번, “신문지조차 구하기 힘들다”는 대목에서 또 한 번. 그러고도 헛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종이신문을 읽는 사람들을 찾아보고자 친구들은 물론, 친척, 취업 스터디원 등 연락이 닿는 사람에게 모두 물어보았지만 단 한 명도 읽지 않는다고 답했다.” “과제를 받고 지난 한 주간 종이신문을 읽는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또래가 아닌 사람들 중에서 한 명쯤은 아직도 종이신문을 읽을 거라고 믿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열심히 수소문해봤지만 종이신문을 구독 중인 사람을 결국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이미지는 ‘할아버지’였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집 안방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던 종이신문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1/3이 할아버지를 언급했다. 문제는 그 할아버지의 오늘이다. “집 앞에 신문 뭉치를 쌓아 놓던 옆집 할아버지도 구독중지 의사를 여러 차례 밝힌 끝에 신문을 끊으셨다고 한다.” “종이신문을 계속 읽을 것 같았던 나의 조부모님 역시 인터넷 뉴스를 읽으신다.” “어른들이 아무도 안 봐 놀라웠다. 할아버지, 엄마, 이모들에게 모두 물어보았는데 아무도 안 본다고 했다.” 아버지와 동생을 인터뷰한 한 학생은 기성세대인 아버지가 동생보다 종이신문에 애착이 있을 거라는 예단이 착각이었다고 전했다. 아, 확인사살당하는 기분.
3년 만에 편집국에 돌아왔다. 콘텐츠 개편 티에프팀 팀장을 맡았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9년 언론수용자 조사에 따르면 종이신문의 열독률은 12.5%. 2016년 봄에도 편집국 지면개편 티에프팀의 일원이었다. 당시 같은 조사의 열독률은 25.4%(2015년). 그새 절반으로 떨어졌다. 하루 종이신문 이용시간도 같은 기간 7.9분에서 4.2분으로 추락했다. 신문 구독자 인터뷰에 성공한 학생들은 종이신문의 장점을 수집해왔다. 지저분한 팝업 광고가 없는 점, 꼼꼼한 선별과 검증과 편집 구성력, 생각과 느낌을 갖게 하는 힘 등. “신문 읽으면 주의·집중력이 높아진다”는 뇌과학자들의 연구결과까지 추가할 수 있지만 허망하다. 추세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근에 만난 한 언론학자는 진지하게 물었다. “왜 매일 꼭 프린트 신문을 내야 하나요?”(한국 언론학자의 절반 이상은 종이신문을 안 본다는 게 내 경험에 근거한 추론이다) 신문을 찍어야 할 이유는 수십 가지가 넘는다. 이런 황당하고 불쾌한 질문이 있나.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는 세상이 왔음을 부정할 수도 없다
종이를 모바일이 대체한다. 다양한 수단으로 기사를 읽은 비율을 의미하는 결합열독률은 2019년 기준 88.7%다. 2018년 기준 86.1%보다 늘었다. 안 본다, 가 아니라 더 본다, 가 진실에 가깝다.
오늘도 윤전기는 돈다. 대다수의 전통 미디어 회사에서 종이는 여전히 콘텐츠를 잉태하는 강력한 플랫폼이다. 지면은 소중하다. 종이신문 독자는 최후의 1인까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매체환경이 변한다고 그들이 투명인간 취급받을 이유는 없다. 다만 냉혹하고 비정한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환청이 들린다. 너 아직도 신문 만드니? 왜 만드니? 어떻게 만들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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