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희의 시진핑 시대 열전 _15
![왕치산 중국 부주석(당시 부총리)이 2008년 6월18일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과 워싱턴 재무부 청사에서 미-중 에너지·환경 협력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왕치산 중국 부주석(당시 부총리)이 2008년 6월18일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과 워싱턴 재무부 청사에서 미-중 에너지·환경 협력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00/488/imgdb/original/2021/0119/20210119503098.jpg)
왕치산 중국 부주석(당시 부총리)이 2008년 6월18일 헨리 폴슨 미국 재무장관과 워싱턴 재무부 청사에서 미-중 에너지·환경 협력협정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시진핑 지도부는 공산당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가장 심각한 기득권 세력이 금융 분야에 있고, 개혁의 최대 난제라고 본다. 하지만 이미 9년차에 접어든 ‘부패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라이샤오민의 천문학적 뇌물 수수가 보여주듯 부패의 깊은 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만연한 부패의 근본 원인은 공산당과 국유기업에 너무 큰 권력과 자원이 집중된 시스템 자체이기 때문이다.시진핑 지도부가 막 출범한 2013년 초, 중국에 19세기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중국어판 <구제도와 대혁명>)을 읽는 열풍이 불었다. ‘부패와의 전쟁’을 지휘하며 ‘사실상의 2인자’로 주목받던 왕치산(王岐山)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한 간담회에서 추천한 이 책은 곧 공산당 간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토크빌은 혁명은 가장 낙후되고 압제에 찌든 사회에서가 아니라, 개혁과 번영이 시작되고 시민들이 사회의 문제에 눈을 뜰 때 일어난다고 했다. 왕치산은 중국이 바로 그런 상황에 있다는 ‘경고’를 보내려 했을 것이다. 왕치산이 지휘한 부패와의 전쟁은 초기엔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개혁이 빠르게 진전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시진핑 집권 1기(2013~2018) 동안 왕치산은 ‘호랑이부터 파리까지’(고위관리부터 하급관리까지) 부패관리 수십만명을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프랑스 혁명의 교훈을 들면서 ‘부패와의 전쟁’을 지휘한 왕치산은 역사학자이자 경제 전문가이며, 30년 넘게 미국 경제계와 중국을 이어온 ‘미국통’이다. 1948년 건설부 소속 선임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왕치산은 문화대혁명 시절 산시성 량자허의 척박한 시골로 하방되었다. 고된 노동을 하던 시절 그는 일생을 함께하게 되는 두 인물을 만났다. 한 명은 아내가 되는 야오밍산인데, 1980년대 중국 부총리이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되는 야오이린의 딸이다. 1976년 야오밍산과의 결혼으로 왕치산은 ‘태자당’(혁명원로·고위지도자의 자녀)의 일원이 되었다. 한 명은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 시기에 고난을 함께하며 평생의 지기가 된 시진핑이다. 시진핑은 왕치산이 살던 동굴집을 찾아와 같은 이불을 덮고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고 한다. 1970년대 왕치산은 산시성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시베이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문혁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와 1980년대 중국공산당의 농촌정책연구실과 국무원 농촌발전연구센터의 연구원으로 농촌 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9년 왕치산은 중국인민건설은행 부총재로 금융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1990년대에 주룽지 총리는 그에게 국유기업 개혁의 핵심 역할을 맡겼다. 이 때부터 왕치산과 미국 월스트리트(월가)의 끈끈한 꽌시가 시작되었다. 1996년 9월 중국건설은행 행장이던 왕치산이 월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의 헨리 폴슨 사장을 찾아가 중국 최대 국유통신기업인 차이나텔레콤(中國電信)의 기업공개(IPO)를 논의했다. 차이나텔레콤 상장에 뒤이어 많은 중국 국유기업들이 월가 투자은행들과 손잡고 미국 증시에 상장해 자금을 모았다. 곧 월가 금융자본가들에게 중국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다. 1970년대 미국의 노동운동이 강해지고 임금이 오르자 미국 자본가들은 노동집약형 산업을 중국으로 이전하고 자신들은 고수익이 나는 금융과 기술에 집중하는 쪽으로 구조조정을 했다. 중국은 저임금 노동력에 기반한 수출산업에 의존해 급성장하는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이런 분업구조에서는 가장 큰 이윤이 미국의 자본가들에게 흘러가고, 중국공산당 지도부, 관리, 자본가들도 엄청난 부를 챙겼다. 특히 수출지향 경제에서 막대한 부를 얻는 중국 중앙정부, 연해지역 지방정부, 수출기업 경영자들과 미국 월가 자본가들 사이에는 긴밀한 ‘공생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런 구조에서 왕치산은 중국과 미국 특히 월가의 금융자본을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왕치산과 가까운 월가 금융계 인사들은 중국이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할 수 있도록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8년 부총리가 된 왕치산과 미국 재무장관 헨리 폴슨은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양국 경제 문제 논의를 주도했다. 흥미로운 것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오만해진 왕치산의 태도다. 당시 미국을 방문한 왕치산 부총리는 헨리 폴슨을 만나 “당신은 나의 스승이었지, 그렇지만 지금 당신네 시스템을 보게, 우리가 더이상 당신들로부터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네”라고 말했다고 폴슨은 회고록 <중국과 협상하기>에서 썼다. 시진핑 시대 ‘부패와의 전쟁’ 총사령관으로서 무소불위의 지위에 오르는 듯 보였던 왕치산은 2017년 정치적 곤경에 빠졌다. 미국에 망명 중인 중국 재벌 궈원구이가 왕치산 일가가 하이난항공그룹(HNA)을 이용해 거액의 재산을 부정 축재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왕치산이 배우 판빙빙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주장도 내놨다. 그해 10월 19차 당대회를 앞둔 권력투쟁 속에서 시진핑-왕치산에 적대적인 세력들이 궈원구이를 통해 정치적 공격에 나섰다는 해석이 나왔다. 2017년 말 당대회에서 당시 69살의 왕치산은 ‘7상8하’(七上八下·68세부터 은퇴)의 비공식 규정에 따라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났지만, 이듬해 3월 국가 부주석으로 화려하게 복귀해 주목을 받았다. 왕치산이 공산당의 당직은 내놓았지만, 사실상의 2인자로서 미-중 관계를 비롯한 대외정책을 지휘할 것이라는 전망이 파다했다.
![2016년 3월3일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열린 인민대회당에서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시진핑 국가주석과 이야기하고 있다. 베이징/신화 연합뉴스 2016년 3월3일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열린 인민대회당에서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시진핑 국가주석과 이야기하고 있다. 베이징/신화 연합뉴스](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837/601/imgdb/original/2021/0119/20210119503095.jpg)
2016년 3월3일 전국인민대표회의가 열린 인민대회당에서 왕치산 중앙기율검사위 서기가 시진핑 국가주석과 이야기하고 있다. 베이징/신화 연합뉴스
![](http://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203/135/imgdb/original/2021/0119/2021011950309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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