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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진순 칼럼] ‘주노초남보’의 복권을 위하여

등록 2020-12-22 17:46수정 2020-12-23 02:42

목적지가 변경된 선로에서 폭주 기관차에 올라타든가 뛰어내리기,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의회는 존재 의미가 없다. 둘 중에 우리가 찾던 정답은 없다. 빨강과 파랑의 이분법적 선택지는 위선이고 폭력이다. 링 밖으로 밀쳐진 주노초남보의 무명씨들을 호명한다. 그 이름은 자유민주주의이다.

이진순 ㅣ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엄연히 존재하지만 이름을 잃으면 유령이 된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모든 정치적 담론은 납작한 이진법에 밀려 생명 없는 몸짓이 되었다. ‘빨주노초파남보’에서 빨강과 파랑을 제외한 일체의 색깔은 불온한 것, 양비론적인 것, 무책임한 것,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어 이름을 잃고 허공을 맴돈다. 주노초남보는 우리의 정치적 가시광선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와 상징을 점령하고, 선악 구도 속에서 택일을 종용하는 것은 지배자의 오래된 수법이다. 자유주의란 권력의 부당한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고 법치에 따라 모든 사람을 사상과 행동의 주체로 존중하는 것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가장 반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자유주의를 참칭했다. 박정희의 자유주의는 반공 국가주의와 동의어였다. 반공이 아닌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적이고,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흔드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재벌의 위세가 정치권력을 압도할 만큼 성장한 이후 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환치되었다. 권력과 자본은 자유를 자신의 존재근거로 삼고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유를 압살했다.

그래서 자유는 신물 나는 용어가 되었다. 8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은 자유주의를 경멸했다. 자유주의는 물정 모르는 낭만주의자들의 관념적 이상, 나이브한 것, 개인주의적이고 몰역사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너는 리버럴이야!”란 말이 서구에서는 진보적이란 뜻으로 통용되지만, 우리 민주화운동의 전통에서는 ‘무능하고 유약한 관념주의자’를 뜻하는 멸칭이었다. 자유주의가 결핍된 민주주의의 이상은 다분히 군사적이고 국가주의적이었다. 독재자의 반자유적 국가주의는 반독재세력의 민주화운동에도 미세먼지처럼 스며들었다.

우리에게 온전한 의미의 자유주의가 깃들기 시작한 것은, ‘포스트87세대’부터인지도 모른다. 개인성에 대한 가치 부여,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관용을 중시하는 새 세대가 탄생한 것은 87년 6월항쟁이 거둔 가장 값진 성과이다. 그러나 이들은 무어라 이름 붙여지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배제되고 운동장 밖으로 밀쳐져 있다.

자유라는 말만큼이나 지금 오염되고 퇴락한 용어가 개혁이다. 원래 검찰개혁은, 첫째 권력으로부터의 독립, 둘째 독점적 권한의 분산, 셋째 국민적 감시와 인권 보호가 그 핵심이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검찰개혁은 공수처 설치, 윤석열 해임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에 반대하면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이로 역적 취급을 받는다. 나는 절대적으로 검찰개혁에 찬성한다. 그러나 지금의 공수처는 검찰개혁의 원래 목표에서 엇나가도 많이 엇나갔다. 공수처가 설치되면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국민적 감시와 통제를 받는 검찰을 만들 수 있을까?

“검사가 정치적 판세나 자기 개인의 승진을 고려하며 대통령, 집권당의 실세, 유력 대통령 후보, 그리고 이들 측근의 눈치를 보는 순간, 권력형 비리에 대한 수사는 ‘내부검열’에 따라 한계가 그어지기 마련이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2008년 출간한 <성찰하는 진보>에 쓴 말이다. 그의 지적에 동의한다. 검찰개혁의 요체는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사정의 칼날을 휘두를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야당 비토권을 없애고 시민심의권도 실종된 현재의 공수처법으로는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보장하기 어렵다. 정치검찰이란 괴물을 없애겠다면서 또 다른 괴물을 만들었다. 패착이다.

이 상황에서 어느 괴물의 편에 설 것인지 답해야 하나? 토론과 숙의가 실종된 공수처법 표결에서 전체 국회의원 중 조응천 불참, 장혜영 기권, 고작 두 표만이 앙상한 가지의 마지막 잎새처럼 위태롭다. 개혁은 권력자의 얼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자유주의를 복원하고 민주적 절차를 되살리는 일이다. 목적지가 변경된 선로에서 폭주 기관차에 올라타든가 뛰어내리기, 둘 중 하나를 강요하는 의회는 존재 의미가 없다.

코로나와 생활고로 우울한 연말, 정치는 인사와 징계와 소송을 둘러싸고 연일 대치 중이다. 화환 늘어놓기 경쟁까지 이어졌던 추미애-윤석열 갈등은 추미애 장관이 사의를 표한 후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청와대 청원사이트에 추미애 재신임을 요구하는 청원과 윤석열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청원이 나란히 올랐다. 둘 중에 우리가 찾던 정답은 없다. 빨강과 파랑의 이분법적 선택지는 위선이고 폭력이다. 링 밖으로 밀쳐진 주노초남보의 무명씨들을 호명한다. 그 이름은 자유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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