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보통신 기업 화웨이의 런정페이 회장(오른쪽)이 2015년 화웨이의 런던 지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이야기하고 있다. 런던/AFP 연합뉴스
중국은 ‘따라잡기 근대화 시대’는 끝났으며,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21세기 대장정의 최전선은 첨단기술이고, 이 전장에서 미-중의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1987년 홍콩과 맞닿은 중국 남부 광둥성 선전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퇴역군인이 작은 통신장비 회사를 열었다. 홍콩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연결할 수 있는 장비를 수입해 팔던 이 회사는 곧 자체 제작한 통신장비를 중국 각 지역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보잘것없어 보였던 이 회사는 33년 만에 중국의 미래가 걸린 최첨단 기업으로 변모했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에서 미국의 핵심 표적이 된 화웨이다.
화웨이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런정페이(任正非·76)는 중국 남부 구이저우성 전닝현에서 교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식구가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가난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고 런정페이는 회고한다. 그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인민해방군 엔지니어가 되어 통신장비 개발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80년대 중국이 대규모 군 인력 감축에 나서면서, 군을 퇴역한 런정페이는 화웨이를 창업했다.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과 긴밀하게 연결된 회사라는 의혹은 화웨이를 계속 따라다닌다. 화웨이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는데, 인민해방군과 각 지역 지방정부에 통신설비를 대규모로 납품한 것이 주요 동력이었다. 1994년 런정페이는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자체 통신장비를 가지지 못한 국가는 군대 없는 국가와 같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지난 6월 미국 국방부는 화웨이를 “인민해방군이 소유 또는 지배하고 있는 회사”로 지목했다. 화웨이는 런정페이 회장을 비롯한 10만4천여명의 전·현직 임직원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비상장사인 화웨이의 정확한 지분 구조가 공개된 적은 없다.
화웨이는 끊임없이 기술혁신을 강조하며, 해마다 수익의 10%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전세계 화웨이 직원은 총 19만4천여명인데 이 가운데 8만명 이상이 연구직이다.
미국이 화웨이를 정조준하고 나선 이유는 미국 기업들이 5세대(5G) 통신장비 경쟁에서 화웨이에 밀렸기 때문이다. 화웨이의 5G 장비는 경쟁 제품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에 뛰어난 기술력의 가성비로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미국은 중국 공산당과 군이 거액의 보조금을 화웨이에 제공하고 해킹을 통해 훔친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첨단기술을 화웨이에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화웨이 공방전’의 본질은 미래 산업과 군사기술, 우주기술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다. 이 분야의 핵심인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드론과 무기 정보가 5G로 본격화된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타고 이동한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이데올로기와 핵무기를 둘러싸고 벌어졌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 ‘신냉전’은 초고속 통신망과 반도체, 빅데이터, 인공지능, 양자컴퓨터의 우위를 둘러싸고 이미 시작되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세계는 10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대변동의 국면(百年未有之大變局)을 맞고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서구가 주도하는 자유주의 세계질서가 쇠락하면서 중국이 서구를 뛰어넘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할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는 뜻이다.
19세기 후반 이래 중국은 발전된 서구를 뒤쫓고 모방하려 했고, 개혁개방 이후에도 수십년간 미국이나 유럽, 한국, 일본의 발전 전략을 모방하고 뒤쫓는 ‘따라잡기 근대화’의 길을 달려왔다.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받아들였을 때, 그들이 중국에 주문한 역할은 서구가 설계한 제품을, 서구에서 제조한 핵심 부품과 기계를 들여와, 중국의 저임금 노동력으로 조립해 수출하라는 것이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술 패러다임이 바뀌는 순간 중국은 글로벌 가치사슬의 윗자리로 도약할 기회를 잡았다. 시진핑 시대 중국은 자국 첨단기술을 도약시킬 ‘중국제조 2025’ 구상을 2015년 발표했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에 힘입어, 중국 기업들은 5G 초고속 통신, 빅데이터를 활용한 얼굴·음성 인식, 전자결제 분야에서 미국과 유럽을 앞질렀다. 중국은 ‘따라잡기 근대화 시대’는 끝났으며, 건국 100주년인 2049년까지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2018년 5월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로 시작된 미-중 무역전쟁은 곧 중국의 첨단기술 도전을 물리치려는 기술 패권 전쟁으로 전환됐다. 2018년 12월1일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무역전쟁 휴전에 합의한 바로 다음날, 런정페이 회장의 딸이자 화웨이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멍완저우가 미국 정부의 요구로 캐나다에서 체포됐다. 미국의 제재를 위반하며 이란과 거래해왔다는 혐의로 미국이 그를 수배했기 때문이다.
멍완저우 체포는 미국이 화웨이와 중국의 첨단산업을 정조준하는 신호탄이었다. 미국은 수출통제 규정을 계속 바꿔가며 두 방면에서 화웨이를 공격했다. 하나는 화웨이 장비에 설치된 ‘백도어’를 통해 정보가 중국 공산당과 군에 넘어간다며 세계 각국이 화웨이 5G 통신장비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압박한 것이다. 미국이 명확한 증거를 제시한 적은 없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백도어’는 프로그램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탐지가 어렵고 업데이트 과정에서도 추가할 수 있다. 미국도 이런 기술로 세계 각국의 정보를 감시하고 있다고 미 국가안보국(NSA) 전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폭로한 바 있다. 미국이 전세계를 감시해왔던 기술을 중국도 갖추자 미국이 본격적인 견제에 나섰을 것이다.
또 하나의 전선은 화웨이가 전세계 기술 공급망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고사작전’이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 9월15일부터 전세계 어떤 기업도 미국 상무부 승인 없이는 미국의 기술이나 소프트웨어가 들어간 반도체와 전자부품을 화웨이에 공급할 수 없도록 제재를 가했다.
기술 패권 전쟁에서 미국의 ‘무기’는 반도체다. 전세계 반도체 칩 설계, 반도체 생산용 소프트웨어와 핵심 장비, 기술은 모두 미국이 통제하고 있다. 미국의 제재가 발효되자, 화웨이의 자회사인 하이실리콘이 설계한 기린칩을 위탁생산하던 대만 기업 티에스엠시(TSMC)를 비롯해 삼성과 하이닉스, 독일과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까지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줄줄이 화웨이와의 거래를 끊었다. 미국은 중국 최대의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인 중신궈지(中芯國際·SMIC)에 대해서도 거듭 제재를 강화해 미국 기술에 대한 접근을 차단했다.
화웨이는 중국 국내 애국주의 소비에 의지하면서, 제재에 대비해 사재기해놓은 부품과 반도체를 활용해 버텨나가고 있지만, 해외시장에서 휴대폰과 5G 통신장비 사업 모두 큰 타격을 받고 있다. 영국, 일본,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16개국이 화웨이 5G 장비의 사용을 금지하거나 엄격하게 제한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8년 후베이 우한의 신신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시찰하고 있다. 우한/신화통신 연합뉴스
중국 정부가 2014년 이후 1조위안(약 170조원)을 자국 반도체 산업에 투입했고 시진핑 주석이 직접 나서 독려하고 있지만, 중국 반도체 기술은 아직 세계 첨단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다. 최첨단 초소형 반도체 생산 공정 경쟁의 핵심은 반도체 회로를 얼마나 가는 선으로 새기고 깎아내는지에 달려 있는데, 삼성과 티에스엠시 등 첨단 기업들은 이 선의 굵기를 5나노(10억분의 1m) 이하로 줄인 데 비해, 중국은 14나노를 생산하기 시작한 단계다.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15% 정도로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반도체 산업은 전세계적 협업의 정밀한 ‘생태계’다. 미국·영국·한국이 설계하고, 대만과 한국이 생산하고, 일본과 네덜란드가 첨단 장비를 만드는 식이다. 지금과 같은 제재가 계속된다면 중국은 이 모든 것을 홀로 다 해내야 한다. 반도체는 기술개발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 공정이 극도로 복잡해 중국이 단기간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예상한다.
그러나 중국은 화웨이와 ‘반도체 굴기’가 상징하는 첨단기술 경쟁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첨단기술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패권 경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중국 지도부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중국은 마오쩌둥 시대에 소련의 견제를 이겨내고 ‘양탄일성’(원자폭탄·수소폭탄·인공위성) 개발에 성공한 것처럼, 이번에도 미국의 공세를 이겨내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최근 중국 당국은 무차별적으로 반도체 관련 기업에 돈을 쏟아붓던 정책을 중단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개입해 경쟁력 있는 핵심 기업을 집중 육성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이현태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미국 첨단기술 기업들도 거대한 중국 시장과의 거래를 끊을 수는 없기 때문에, 조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의 5G 네트워크, 반도체, 인공지능, 금융을 견제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며, “미-중이 모든 분야에서 갈라서기(디커플링)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안보, 패권과 직결되는 통신네트워크와 금융 등 핵심 영역에서 갈라지는 ‘불균질한 디커플링’의 흐름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미국이 동맹국을 결집하고 중국은 러시아와 일대일로 국가들을 규합해 버티면서,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세계가 양대 진영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
미국과의 긴장이 한껏 고조된 2019년 5월20일 시진핑 주석은 장시성 간저우의 대장정 출발 기념비를 방문해 “새로운 대장정을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21세기 대장정의 최전선은 첨단기술이고, 이 전장에서 미-중의 물러설 수 없는 치열한 공방전이 세계를 뒤흔들 것이다.
박민희 | 논설위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중국 인민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중국과 이란>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혐중’에 반대한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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