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순조로웠다. 안무를 무용계의 전설 마리우스 페티파가 맡았다. 차이콥스키도 의욕을 보였다. 발레에 합창을 넣고(눈꽃송이 왈츠) 새 악기 첼레스타를 도입했다(사탕요정 춤). 그런데 일이 꼬였다. 페티파는 중간에 앓아누웠고, 1892년 12월18일의 첫 공연에 대한 평론가 반응은 싸늘했다. 차이콥스키는 ‘호두까기 인형’을 망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1954년에 반전이 일어난다. 미국 뉴욕 공연이 대박이 났다. ‘미-소 냉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있다. 새 안무를 맡은 게오르게 발란친이 고향 소련으로 돌아가는 대신 미국행을 택한 사람이라서다. 발레는 미국을 근거로 곧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종교색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크리스마스의 상징이면서도 아기 예수가 나오지 않는다.” <비비시>(BBC)의 2015년 분석. 정치적이지 않아 보이던 ‘호두까기 인형’이 어쩌면 정치적 텍스트일지도 모른다.
최근 뜨거운 이슈이기도 하다. 먼저 인종주의 논란. ‘중국 사람 춤’의 국적 불명 안무가 문제다. 흑인이 여주인공을 처음 맡은 것도 2019년이다. “사실 많이 늦었죠.” 11살의 프리마돈나 샬럿 네브레스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다. 성차별 문제도 있다. 페티파의 안무에서 여성은 수동적이라는 지적이 요 몇년 사이 나온다. 지난해 데이턴 발레단 공연에서 남자가 하던 호두까기 인형 역할을 처음으로 여성이 맡기도 했다.
차이콥스키의 성정체성도 다시 논쟁이다. 2013년에 러시아 정부가 “차이콥스키는 게이가 아니었다”고 발표했기 때문.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자료가 차고 넘치는데도”(<가디언>의 당시 기사) 이 뜬금없는 주장이 나온 일이, 푸틴 정부의 동성애자 탄압과 맥락을 같이한다며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