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호텔을 리모델링해 지난달 30일 입주를 시작한 서울 성북구 안암동의 ‘안암생활’. 1인 가구 청년을 위한 공공임대주택이면서 공유주택이다. 연합뉴스
안재승│논설위원실장
지난해 이맘때쯤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전거지’(전세 사는 거지), ‘월거지’(월세 사는 거지)라며 임대주택에 사는 친구들을 따돌린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이들보다 부모 잘못이 크다고 생각했다. 분양아파트와 임대아파트가 함께 있는 단지에서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치고, 자신의 아이들과 임대아파트 아이들의 학군을 달리해달라고 교육청에 민원을 넣고, 아파트값 떨어진다며 주변에 청년임대주택이 들어오는 걸 반대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웠겠는가. 집을 거주 공간이 아닌 오직 돈으로,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는 부모들의 삐뚤어진 인식이 아이들에게까지 스며든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난 얘기를 꺼낸 것은 전거지, 월거지 못지않은 ‘혐오 표현’이 나돌고 있기 때문이다. ‘호텔 거지’다. 정부의 전월세 대책 중 ‘호텔 리모델링 청년주택’을 비하한 신조어다. 차별과 배제의 혐오 표현을 배격해야 할 언론과 정치권이 의도적으로 퍼뜨린다는 점에서 훨씬 더 나쁘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17일 오전 관훈토론에서 정부의 전월세 대책을 묻는 질문에 “금명간 국토부가 발표할 것이다. 매입주택이나 공공임대주택을 엘에이치(LH, 한국토지주택공사), 에스에이치(SH, 서울주택도시공사)가 확보해서 전월세로 내놓는다든가, 오피스텔·상가 건물을 주택화해서 전월세로 내놓는다거나, 호텔 중에서 관광산업이 많이 위축돼 내놓는 경우가 있는데 호텔방을 주거용으로 바꿔 전월세로 내놓는 방안 등등이 포함돼 있는 걸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이 이날 오후 이 대표의 답변 중 호텔을 부각해 “이게 문재인 정부의 전월세 대책” “호텔을 주택으로 바꾸겠다” 등의 제목을 달아 보도했다. 전체 내용을 모르는 누리꾼들이 “호텔 거지” “피난민 숙소” 등의 댓글을 달았다. 이들 신문은 댓글을 인용해 “민심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다시 기사를 썼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온라인에는 “벽도 얇은 호텔방에서 아이들과 어떻게 살란 말이냐” “난 방직공장, 친구는 모텔에 살아요”라는 조롱 글이 올라오고 ‘호거’(호텔 거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며 “하루빨리 오기·아집을 버리고 임대차법을 고쳐 전세시장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 발표가 나오기도 전에 전월세 대책에 ‘호텔 거지’라는 낙인을 찍고 국민 불신을 부추긴 것이다. 여기에 국민의힘도 가세했다. 이곳에서 살 청년들이 받게 될 상처는 눈곱만큼도 마음에 두지 않은 듯하다.
또 다른 문제는 혐오 표현이 가득 찬 보도를 사실 확인 없이 쏟아냈다는 점이다. 호텔 리모델링 청년주택을 가보면, ‘호텔 거지’라는 말이 얼마나 악의적인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호텔 리모델링 청년주택은 정부가 지난 3월부터 추진해온 정책으로, 지난달 30일 입주를 시작한 서울 성북구 안암동의 ‘안암생활’이 제1호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사회적기업 아이부키가 관광호텔을 리모델링해 문을 연 안암생활은 공공임대주택이면서 공유주택이다. 사회초년생, 취업준비생, 대학생 등이 입주 대상이다. 세련된 외관과 깔끔한 인테리어의 안암생활은 지하 3층, 지상 10층 건물 중 3~10층에 실거주면적 16~39㎡의 원룸 122호가 있다. 방에는 침대, 에어컨, 냉장고, 붙박이장 등이 빌트인으로 설치됐고 샤워를 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 지하 2개층과 지상 1층엔 주방, 세탁실, 회의실, 작업실 등 공유시설이 있고, 옥상엔 요즘 청년들이 좋아한다는 휴식공간 ‘루프톱 라운지’가 있다. 임대료는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27만~35만원으로 인근 시세의 45% 수준, 관리비는 월 6만원으로 50% 수준이다. 한번 계약에 2년, 두차례 계약 갱신이 가능해 6년 동안 거주할 수 있다. 1인가구 청년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지난 8월 입주자 모집 공고를 내자 250명이 신청했다고 한다.
안암생활이 언론에 공개되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1인 가구 청년주택이라는 사실은 눈감은 채 3~4인가구가 여기서 어떻게 사느냐고 또 생트집을 잡는다. 차라리 1인가구 청년들이 계속 증가하는데 이런 주택을 얼마나 많이 공급할 수 있겠느냐고 문제 제기를 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졌을 것이다.
국민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정부 정책을 접한다 . 국민들은 현장에 가보거나 정부 발표를 직접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 . 대안 제시는 기대도 하지 않는다. 사실을 확인한 뒤 보도하고 합리적으로 비판하라는 것이다. 이걸 하지 않겠다면 언론사란 간판을 내리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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