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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전태일 열사는 훈장을 기뻐했을까

등록 2020-12-01 14:05수정 2020-12-02 14:08

경제 규모가 최하위 수준인 가난한 나라라면 모를까 경제 수준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나라들 중에서 이와 같은 불균형 현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이와 같은 불균형 현상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법 제도가 이른바 ‘전태일 3법’이다.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청소년들에게 노동문제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파업은 경제적 손실을 발생시키고 시민의 불편을 초래하지만 노동자에게 그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 200여년의 산업화 과정에서 검증됐기 때문에 전세계 많은 나라에서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더니 첫눈에 보기에도 매우 영민해 보이는 청소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렇다면 제가 자전거를 훔쳐서, 그 자전거로 열심히 일을 해 돈을 많이 벌어서 기부금을 내면 사회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묻는 청소년의 마음속에는 노동자의 ‘파업’을 자전거를 훔치는 ‘도둑질’과 같은 행위로 보는 시각이 담겨 있다. 또 다른 학생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회사를 경영하는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노동유연성이 너무 경직돼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도 마음대로 고용하지 못하게 규제하고, 최저임금은 너무 많이 인상하고, 대기업 정규직 귀족 노동자의 기득권이 막강해서 회사 경영에 곤란을 겪고 있다면, 그 회사 사장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청소년들의 그러한 생각은 주로 언론이 만들어온 프레임이다. 과거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언론이나 시민의 시선이 다소 호의적이었다. 노동운동이 부도덕하고 부패한 정권에 맞서는 정치적 민주화운동의 견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시각이 결정적으로 뒤바뀐 계기는 무엇보다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이다. “우선 기업이 살아야 한다”는 정서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면서 기업의 이윤 추구가 모든 인륜 도덕 가치 위에 군림하는 ‘경제염려증’ 현상이 나타났다. 정치인이 “세월호 사건 진상 규명에 지나치게 매달리면 경제가 어려워진다”고 국민들을 협박하고, 그 협박에 부화뇌동한 청년들이 유가족 단식 농성장 앞에서 즉석식품(패스트푸드)을 먹으며 ‘폭식 투쟁’을 하는 모습이 바로 경제염려증의 증상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노동운동이 목소리를 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촛불 시민’들조차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에 대해 “조금만 기다리면 ‘노동 존중 사회’를 표방하는 문재인 정부가 어련히 알아서 해결해줄 텐데, 노동자들이 너무 성급하게 요구한다”는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소중한 연대 세력을 잃은 셈이다.

실상은 어떠한가? “최저시급 1만원” 공약은 대통령이 일찌감치 “임기 내에 지킬 수 없게 돼 미안하다”고 포기 의사를 밝혔고, 인천국제공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던 대통령의 “공공 부문 비정규직 제로” 선언은 “노력하지 않은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으로 무임승차하는 로또 취업”이라는 비난만 불러일으킨 채, 대부분 ‘무늬뿐인 정규직’이라는 자회사 정규직화로 마무리됐고, 최저임금 두자릿수 인상은 상여금이 최저임금에 포함되도록 산정 방식이 개정되면서 대부분 감쇄됐다.

청와대에서 열린 전태일 열사 국민훈장 추서식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훈장은 ‘노동 존중 사회’로 가겠다는 정부 의지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노동조합 활동가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전태일 열사가 그 훈장을 받고 과연 기뻐했을 것인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발언들이 많았다. ‘전태일 3법’을 정부가 앞장서 추진하는 것을 전태일 열사는 더 기뻐했을 것이라는 주장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짧은 기간에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과정에서 기업은 마땅히 들여야 할 노동비용을 절약함으로써 기업경쟁력을 유지하고 이윤을 창출해왔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2위임에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노동지표 순위는 연간 노동시간 1위(가끔 2위), 인구 10만명당 노동재해 사망자 수 1위, 저임금 노동자 비율 1위, 성별 임금 격차 1위 등 부정적 항목들에서 최상위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단체협약 적용률, 비준한 국제노동협약 개수,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적 사회복지 지출, 고위관리직 여성 노동자 비율 등 긍정적 항목들에서는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경제 규모가 최하위 수준인 가난한 나라라면 모를까 경제 수준이 우리나라와 비슷한 나라들 중에서 이와 같은 불균형 현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이와 같은 불균형 현상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법 제도가 이른바 ‘전태일 3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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