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을 21세기에 불러오는 일은 ‘소수’의 ‘진정한 자유’를 찾는 일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내고 경제정치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노련함의 목소리가 아니라, 세월을 버틴 거칠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짐짓 늙은 척하지 않는 것이다. 삿대질의 도구로 쓰기에는, 밀은 너무 ‘젊다’.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뛰노라”라 하고 “늙어서도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나으리라”고 했던 영국 시인 워즈워스도 나이가 들어서는 시큰둥해졌다. 말년에 써서 잘 알려지지 않은 시에서 그는 청춘이 뭐냐고 묻고는 답한다. “뒤에선 바람 불고 앞에는 바위가 막고 선 곳에서 춤추는 파도”. 한때 프랑스 혁명에 열광하며 혁명 정신을 영국에 전파했던 그가 세파에 춤추다가 요샛말로 보수꼰대가 되었던 사정에 비춰 보면, 그리 놀랍지는 않다. ‘희망, 너는 무엇이냐?’라는 시에는 그의 무지개는 온데간데없다. 희망은 그저 “가느다란 칼날 같은 잔디에 매달린 아침 물방울, 또는 좁은 배신의 골목을 꾸며놓은 거미줄”이라 했다. 물론 그는 “차라리 죽지” 않고 여든살까지 넉넉하게 살았다.
그의 삶이 어찌 되었든 간에 그의 시를 읽고 구원을 얻은 청춘은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가 쓴 <자유론>을 둘러싸고 한국에서 난데없이 논란이 벌어져서 뜬금없이 유명해진 인물이다. 밀은 손꼽히는 천재였다. 세살에 그리스어를 배웠고 여덟살에 라틴어를 깨쳤고, 나를 지금도 전전긍긍하게 하는 두툼한 책을 10대에 깨쳤다. 이런 성취 뒤에는 유별난 아빠가 있었다. 꽤 유명한 경제학자였던 아빠의 뒷바라지는 극성스러웠다. 자신이 추종했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창안자 벤담의 세계에 아들을 끌어들였고, 아들은 이에 부응하여 그 바닥에서 주요인사로 자리 잡았다. 행복의 크기를 계산기로 두들겨 대는 냉정한 ‘과학’을 앞세운 벤담의 사회‘개혁’의 전도사가 되었다.
빨리 세상을 배운 만큼, 위기도 빨리 왔다. 스무살. 똑똑한 그는 물었다. 내가 지금 믿는 대로 세상을 개혁하면, 나는 그런 세상에서 행복할 것인가.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울해졌고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런 삶의 질문에 아버지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그가 훗날 고백했듯이, 그와 아버지의 관계에는 살가움이 없고 “인위적”이었다. 위기는 왔으나, 구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잘 만든 배에 키도 있건만 돛은 없어서 나의 항해는 시작하기도 전에 좌초했다”고 적었다.
좌초 직전에 그를 구원해준 것은 워즈워스의 시였다. 특히 ‘송가’(Ode). 밀은 그 시에서 인간의 느낌, 감정, 그리고 가슴을 회복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특히 벤담과 아버지의 삭막한 공리주의 속에서는, 삶의 감성적 이해는 주관적 환영일 뿐이라 했는데, 밀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이런 이해방식 자체가 세상의 변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임을 깨달았다. 아마도 이런 구절에서 그는 가슴을 쳤으리라. “내가 봐왔던 것들,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네” “한때 눈부시게 빛나던 것들, 이제 내 눈에서 영영 사라진다 할지라도 …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 남아 있는 것들에서 힘을 얻으리라.”
그 이후, 밀은 다시 항해에 나섰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줄었고, 그나마 의례적이었다. 지도 없는 항해가 으레 그렇듯이 좌충우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방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의 ‘다면성’에 주목하면서, 당시 급속도로 분화하던 사회의 여러 목소리를 변화의 중심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숫자로는 다수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소수인 계층의 ‘행복’이 진정한 ‘다수의 행복’이 되는 방안을 고민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물려받은 정신적 자산을 냉담하게 물리치지 않으려는, 가망 없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당연히 ‘절충주의’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공리주의를 지킨다면서 핵심을 뒤집어버린 철학자, 임금 억제를 주장하는 고전파 경제학을 계승한다면서도 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를 인정한 반란의 경제학자, 그리고 아버지를 옹호하려다 그를 온전히 부정해버린 아들이었다.
이런 부정과 모순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밀은 그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들을 따라갔고, 또 과감하게 실천했다. 여성과 노동자의 참정권을 내걸고 하원 선거에 출마했다. 선거구 예산을 따내는 데만 골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런 공약을 내걸면 당연히 낙선할 것으로 짐작했던 탓인지, 선거에 돈도 따로 쓰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당선되었고, 하원 시절 내내 낮은 ‘소수’의 목소리를 울리는 확성기 노릇을 했다.
실망과 좌절이 왜 없었겠는가. 민주주의라는 외관을 가지긴 했으나, 당시 영국 정치의 벽은 높고도 높았다. 이를 핑계 삼아, 따듯한 안락의자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밀은 그럴수록 더욱 거친 목소리를 내고 ‘과격’해졌다. 시장경제의 수요공급론이 야만스러운 짓을 할 때가 있으니, 궁극적으로는 “사상가, 교사, 예술가, 생산자 그 누구이든 간에 능력만큼 일하고, 일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는 기본원리를 내세웠다. 양성평등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정언명령이었다. 그는 사유재산제를 옹호했으나, 만일 사유재산제가 이 원리를 저해하는 방향으로 운용된다면 마땅히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세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일하여 얻은 소득에 대해서는 가혹하지 말되, 재산과 상속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한다고 했다.
밀은 잘 짜인 논리틀이나 정치신념에 현실을 투영하지는 않았다. 변화무쌍한 현실을 보고 ‘소수’의 행복이 기존 제도와 편견 때문에 희생되고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 가다듬었다. 그가 삶을 항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상의 이치라고 믿었다. “정치제도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인류가 진보함에 따라 정치제도는 변할 것이고 변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란 “항상 사회적 최강자의 손에 있거나 넘어갈 것”이고, “이 권력의 본질이 곧 정치제도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그가 집중한 사안은 그런 정치제도 안에 늘 있을 ‘소수’에게 어떻게 ‘진정한 자유’를 확보하게 할 것인가였다. 그래서 모든 노동자를 위한 노조를 지지했고,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주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자본의 공동소유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적 흐름에도 공감했다. 이런 ‘과격한 늙은이’에 대한 볼멘소리가 나왔다. 그의 대답은 단순했다. 이렇게 떠들지 않으면 “상류계급은 가난한 자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19세기의 존 스튜어트 밀을 21세기에 불러오는 일은 ‘소수’의 ‘진정한 자유’를 찾는 일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끌어내고 경제정치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노련함의 목소리가 아니라, 세월을 버틴 거칠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짐짓 늙은 척하지 않는 것이다. 삿대질의 도구로 쓰기에는, 밀은 너무 ‘젊다’.
늙어감이란 무엇인가. 워즈워스는 다시 묻고 답했다. “한가롭게 펼쳐진 해변에 축 처져 비틀거리는 버드나무”다. 단언컨대, 일흔을 향해 가던 밀은 이 구절엔 결코 동의하지 않았으리라.
(※ 인용부분은 필자의 번역이고, 밀의 인용구절은 모두 <존 스튜어트 밀 자서전>에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