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 임기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최소 2년간 자리를 보장해주겠다는 제도다. 그러나 정치 ‘중립’을 의심받는 총장에게 임기를 보장해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 결단하지 않으면 임명권자가 결자해지하는 수밖에 없다. 장관 역시 더이상 자리 지킬 명분도 실익도 없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11월3일 오후 충북 진천 법무연수원에서 올해 부장검사로 승진한 30여 명을 대상으로 강연을 마치고 강의동을 나서고 있다. 진천/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피고발인 12. 성명불상자(백운규 채희봉(대통령비서실 비서관)의 상급자로서 전체 범행을 지시한 자)’.
제1야당이 고발장에서 이렇게 좌표 찍은 뒤 검찰총장은 “살아있는 권력을 제대로 수사하는 게 검찰개혁”이라고 ‘부하’들 앞에서 일갈했다. 이틀 뒤 충직한 한 부하가 수사관 100여명을 압수수색 현장에 풀었다. ‘조국 사건’ 시즌2가 시작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당사자들은 ‘정책 수사하는 게 아니라 공무원 등의 형사법 위반 수사’라고 하지만 기세는 정책 수사 이상이다. 검찰총장 참모 출신 검사장이 지휘하는 강도 높은 압수수색은 다시 ‘살아있는 권력’을 표적 삼는 모양새다.
그러나 애초 월성 1호기 폐쇄를 놓고 이렇게 난리 칠 일이 아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노후 원전에 대한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2012년 월성 1호기와 같은 노형(CANDU-6)의 캐나다 원전이 ‘폐쇄’ 결정됐다. 2016년 9월엔 하필 월성 원전이 있는 경북 경주 지역에서 국내 최대인 규모 5.8 지진이 발생했다. 지역민들은 “폐쇄”를 강력 요구했다. 법원 역시 ‘높아진 안전 기준에 미흡하다’며 수명(30년)이 지난 원전을 계속 운행하는 게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현 정부가 아니더라도 ‘조기 폐쇄’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정부를 맹비난하는 보수언론들 역시 박근혜 정권 때는 안 그랬다. 2015년 6월 고리 1호기 폐쇄를 결정할 때만 해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며 ‘이참에 원전 폐로산업 육성해야’(2015년 6월13일치 <조선일보> 사설)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언론들의 표변은 정략이 아니면 이해가 안 된다.
그런데 월성 1호기 감사를 지휘하던 감사원장은 이들의 논리에 상당히 공감했던 모양이다. ‘대선 지지율 41%가 국민 대다수 지지냐’라고 했다는 감사원장 발언은 ‘탈원전은 5년 임기 대통령이 결정할 일이 아니’(2017년 6월20일치 <조선일보>)라는 사설과 닮은꼴이다. 선거와 공약에 대한 몰이해가 닮았다. 이례적으로 총선 6일 전부터 사흘 연속으로 감사위원회의를 강행하며 총선 전 발표를 서두른 것도 ‘월성 1호 조작 진상, 총선 뒤로 넘기면 안된다’(2020년 2월20일치 <조선일보> 사설)는 주장에 자극받은 때문 아닌가. 내부의 반대에 부딪히자 집으로 돌아가버렸다는데, 총선에 집착한 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다. 결국 감사원장의 이런 태도가 보수언론과 만나 사안을 정치 쟁점으로 키웠다. 보수언론들은 감사원 발표 직후 ‘월성 1호 폐쇄 주역은 결국 문’ ‘대통령이 (중단 언제 결정) 물은 뒤 장관이 조기 중단 지시’라는 등 대통령을 몸통으로 지목했다.
취임 이후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지휘 방침으로 정한 듯한 윤석열 총장의 ‘사단’이 여기에 뛰어든 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국민만 바라본다’는 윤석열식 ‘정의’도 검찰에 대해선 예외다. 한동수 대검 감찰부장이 지적했듯이 채널에이 사건에선 기자의 ‘휴대폰과 노트북이 수차례 초기화되는’ 상황에서도 감찰을 저지하며 사실상 실체적 진실을 가리는 쪽으로 사건을 지휘했다. 막판까지 수사검사의 직무 배제를 요구하며 대놓고 측근 편을 들었다. 그 과정 내내 보수언론들의 후원이 든든한 뒷배가 돼주었음은 물론이다.
윤 총장의 어법은 이미 정치인에 가깝다. ‘독재’ ‘사회 봉사’ ‘살아있는 권력 수사’ 발언에 이어 이번엔 “사회적 약자 보호가 검찰의 기본적 책무”라고 했다. 약자 보호에 애쓴 검사들과의 간담회도 진행 중이다. 검사 대상 강연에서 말끝마다 ‘국민’ ‘국민’ 하는 것도 검찰총장보다는 대선 주자 느낌이다. “윤 총장이 최근 ‘정치를 해야겠다’는 쪽으로 급속히 기우는 느낌”이라는 지인의 전언(<한겨레> 11월7일치 2면)도 이를 확인해준다. 그간의 행보와 지지층을 보면 당연히 야권 주자다.
임명권자가 환상의 조합을 꿈꿨던 전임자에 이어 ‘추미애-윤석열’ 조합 역시 원수지간이 된 지 오래다. 갈등 상황은 국민들 인내의 한계를 넘었다. 정치인 장관의 권한 남발은 정치 지망생 총장의 정치 행보를 희석하는 보호막이 돼주고 있다.
검찰총장 임기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최소 2년간 자리를 보장해주겠다는 제도다. 그러나 정치 ‘중립’을 의심받는 총장에게 임기를 보장해주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검찰 조직에도, 정권에도, 당사자에게도 ‘독’일 뿐이다. 스스로 결단하지 않으면 임명권자가 결자해지하는 수밖에 없다. 임기 없는 장관이야 (공수처장 추천 말고는) 더이상 자리 지킬 명분도 실익도 없음은 물론이다.
김이택 대기자ri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