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기괴하여 내 한번 따지려 하니, 나도 숨어 있는 자요, 저 죽음에 기대어 사는 자다. 나도 저 당당한 식인의 풍습에서 평온한 것이다. 그래서, 콜럼버스처럼, 나도 편지에 적어 알리지 않고 여기에 홀로 적어둔다. 설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겠는가.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괴상한 일기를 읽었다. 연대기 같기도 한데, 필시 미친놈이 쓴 것이다. 너무나 해괴하여 여기 옮겨둔다.
(날짜 불명) 사람이 어찌 사람을 먹겠는가. 엉망진창인 문명일지라도 온갖 힘으로 지키려는 금도가 있다. 그래서, 또는 역설적으로, 우리는 식인의 소문에 민감하고 궁금해하며, 그런 소문은 기이하게도 모두 바깥바람을 타고 온다. 누구도 본 적이 없지만, 다들 존재하거나 존재했던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거기에 ‘야만’의 선을 긋는다. 야만은 그렇게 늘 바깥의 일이다.
(15세기 어느 날) 식인의 소문으로 따지자면, 콜럼버스가 역대급이다. 그는 신대륙만 발견한 것이 아니다. 식인의 풍문을 유럽으로 옮겨서 아메리카 땅덩어리 같은 물질적 진실로 만들었다. 정작 그는 그런 ‘야만인’을 본 적이 없다. 제 할 말만 나누었던 원주민과의 대화에서 그는 지레짐작하여 식인에 대해 편지에 적어 유럽으로 보냈다. 곧 스스로 의심스러워했으나 이는 일기장에 적어두었다. 진실은 일기장에 묻히고, 소문은 신대륙 소식과 함께 소란스럽게 퍼졌다. 게다가 그는 얼마나 영악했던가. 신대륙에서 식인의 풍습을 없애는 ‘성전’을 이유로 콜럼버스는 스페인 국왕에게 병력과 정치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국왕은 가톨릭의 이름으로 응했고, 그 후로 수많은 노예가 유럽으로 끌려갔다. 유럽의 ‘야만’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야만에는 총칼을 휘두르며 분개했지만, 눈에 또렷한 야만에는 모른 체했다.
(16세기 끝 무렵)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따졌다. 눈앞의 야만을 보라고 했다. “고문과 고형으로 찢고 조금씩 불에 굽고, 개와 돼지에게 물어뜯어 (죽이게 해)” “산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사람을 죽여서 먹는 것보다 더 야만”적이다. 또 ‘식인’으로 오해받은 이들은 우리에게 되레 물을 것이다. 한쪽에는 풍요가 넘치는데 다른 한쪽은 문 앞에서 구걸하고 굶어 죽어가는 불평등을 어찌 용인하는가. 죽어가는 자가 홀로 누리는 자의 목이라도 따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몽테뉴는 식인의 풍습이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발밑에 있다고 고발했다. 고발의 대가는 컸다. 그는 테러당하고 투옥되었다.
(19세기 뒷날) 고래만한 고래를 찾아 나선 얘기인 미국 소설 <모비딕>에는 요상한 구절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침대를 나누어야 한다면 “술 취한 기독교인보다는 멀쩡한 식인종과 자는 것이 낫다”고 했다. 틀림없이 콜럼버스의 은밀한 내막을 알고 몽테뉴가 적어둔 유럽의 ‘야만’을 전해 듣고 쓴 소설이다. 다행히, 작가는 온전했다. 그가 죽고 나서야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0세기 가운데 날) 중국의 괴팍한 사내 루쉰도 뭔가를 발견하고 <광인일기>라는 소설을 썼다. 유교가 창궐한 역사책을 보면 온통 “인의도덕”에 관한 것인데, 그 틈새에는 “사람을 먹는다는 의미의 ‘홀인’이란 두 글자가 적혀” 있더란다. 얼마 전 소작인이 소작료를 감해달라고 했을 때 형의 얼굴에서 식인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래서 사람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더니, 다들 나를 되레 미친 사람(광인)으로 취급했단다. 억울해서 더 생각해보니, 4천년 동안 만연했던 식인의 풍습이었으니, 나도 사람의 살을 먹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광인은 “사람을 먹어보지 않은 아이들”을 구하러 나섰는데, 그나저나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루쉰은 희망이란 길과 같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21세기 가을날) 가을빛이 찬란하게 핏빛이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자꾸 죽는다. 하늘을 거슬러 높이 지어 올리려다 떨어져 죽는 것이야 세상에 단풍이 들기 시작한 이래로 늘 보았던 일이지만, 석탄이니 쇠붙이 같은 원료를 집어넣는 곳에 사람들이 빨려 들어간다. 원대한 기술 덕분에 피 한 방울도 남기지도 않고 인육의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바다에서는 그물을 끌어올리는 곳에 물고기 대신 사람이 걸려들어 간다. 당최, 하늘이고 땅이고 바다를 가리지 않는다. 마치 세상의 음습한 구석에 거대한 용광로가 하나 있어, 거기에 사람이 하나둘 떨어지는 것 같다. 살아 있는 자들은 낙엽에 감탄하고 부러 찾아 나서지만, 육신의 낙엽에는 말없이 한숨만 딱 한번 쉰다. 식인의 풍습에도 계절이 있어 가을이 왔다.
(며칠 후) 숨바꼭질이 국민체조가 되어 다들 꼼꼼 숨어 산다. 코로나바이러스라고 불리는 자가 술래다. 아무리 술래지만, 행패가 영 볼썽사납다. 잡히면 감당해야 할 고생이 만만치 않다. 그렇다고 숨는 일이 쉽지도 않다. 숨어서도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여, 숨어 있는 사람은 숨지 못하는 사람을 불러댄다. 그런 사람을 여기서는 택배노동자라 하는데, 루쉰에게 몇 자락 배운 한자 실력으로 따져보자면, ‘택’은 남의 집을 높여 부르는 것이요, ‘배’는 가져다준다는 뜻이다. 남들이 다 숨을 때 숨지 못하는 사정은 이름만으로도 익히 짐작된다. 그리하여, 내가 루쉰을 흉내 내 “4차혁명”의 틈새를 살펴보았더니, 새로운 경제라는 것이 주문만 디지털 최첨단으로 하는 것이고, 물품은 죄다 사람들이 몸으로 끌고 지고 나른다. 그 옛날에도 보았다. 무슨 혁명이라 하여 흰 연기만 뿜어대는 증기선이 나왔는데, 강가에 들어서는 배를 여린 유부녀들이 끌었다. 사람이 석탄이나 말보다 쌌기 때문이다. 아, 멋진 신세계! 개가 짖고, 돼지가 울어댄다.
(또 며칠 후) 콜럼버스의 노예에게도 자는 시간이 있었다는데, 택배노동은 잠들지 못한다. 새벽에 나와 배달할 물건을 정리하고 챙기고 새벽까지 배달한다. 그러다가 그냥 죽는다. 그냥 죽지 못하면, 스스로 죽는다. “저 너무 힘들어요” 하소연한 후에 죽고, “억울합니다 … 이것저것 빼고 나면 한달에 200만원도 벌지 못한”다고 적고 죽는다. 숨은 자는 한숨을 두어번 쉬고 나서 답한다. 힘들어서 죽은 자는 평소에 건강하지 못해서 죽은 것이요, 스스로 죽은 자는 뭔가 오해하고 죽은 것이다. 몽테뉴가 이미 보았던 세상인데, 지금은 힘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이나 공자를 찾지 않고 어두운 룸살롱에서 영혼의 안식을 구한다. 그 안식을 위해 택배는 오늘도 분주하고, 사람들은 저곳의 사정을 더 궁금해한다. 간단한 죽음의 사연도 알아내지 못하던 사람들이 저 캄캄한 비밀을 신출귀몰하게 찾아낸다. 어찌 야만의 진풍경이라 하지 않을쏘냐.
(다시, 날짜 불명)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기괴하여 내 한번 따지려 하니, 나도 숨어 있는 자요, 저 죽음에 기대어 사는 자다. 나도 저 당당한 식인의 풍습에서 평온한 것이다. 그래서, 콜럼버스처럼, 나도 편지에 적어 알리지 않고 여기에 홀로 적어둔다. 설마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