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뉴딜이 각광을 받는 이유다. 하지만 폴린의 대안은 구조개혁론으로서 함량이 크게 부족해 보인다. 불평등, 삶의 양식 전환 문제를 뒷전으로 돌린 대안이 어디서 사회적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한국에는 사회적 뉴딜의 성격이 약한 폴린의 대안조차 한참 벽이 높다.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이다. 생태-사회적 이중위기로 더 이상 성장 자체도 지속 불가능하게 내몰린 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지구가 거주 불가능하게 되면, 사회 재생산이 지속 불가능하게 되면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강자들이 독식 잔치를 벌이며 묻지마 성장의 비용을 자연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떠넘기고, 성장과 생태적 지속가능성, 사회적 정의 간의 균형을 파괴해온 대가가 실로 크다.
이중위기의 와중에서 2018~2019년은 특별한 해였다. 2018년에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에서 <1.5도 특별보고서>를 발표했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1.5도 이내로 안정화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하며 2030년까지 2010년 대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45%로 감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9년에는 미국 하원에서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주도로 미국판 그린뉴딜 결의안(109호)이 제출되었다. <1.5도 특별보고서>를 따르는 기후위기 극복책과 함께 심각한 불평등 위기 극복책이 그린뉴딜의 통합적 목표임을 천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모든 지역사회와 노동자를 위한 공정하고 정의로운 전환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 제로 달성 △수백만개의 양질의 고임금 일자리 창출과 모두를 위한 번영 및 경제적 안전보장 △21세기 도전에 지속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인프라와 산업에 투자 △깨끗한 공기와 물, 기후와 지역사회 회복력, 건강한 식품, 자연 및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접근권 보장 △모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 금지와 정의 및 공정성 증진 등 5가지가 주요 목표다.
2020년은 또 다른 의미에서 특별했다. 문재인 정부가 한국판 뉴딜의 일환으로 그린뉴딜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름이 그린뉴딜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미국판에 있는 결정적 두 가지가 빠졌다. 첫째, 그린뉴딜이라면서도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전지구적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할 2050년 온실가스 순배출 제로라는 목표가 실종되었다. 둘째, 기후위기 대응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그린뉴딜의 통합적 목표로 삼고 있지 않다. 한국판 뉴딜은 거대한 위기 시대 대응 전략을 ‘1+1+…’ 형태로 나열하고 있다.
파리협정에 따라 올해 말 유엔에 제출할 ‘국가온실가스 감축계획 갱신안’도 구태의연하다.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기존 목표인 5억3600만t으로 유지할 전망인데, 이는 2010년 대비 18.5% 줄이는 것에 불과하다. 한전의 해외 석탄발전 투자도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다. 게다가 삼성화재, 삼성생명이 국외 석탄산업에 지원한 금액이 무려 16조원을 넘어 ‘기후악당 재벌’이라는 지탄을 받아야 할 정도다.
문재인판 그린뉴딜이 무늬만 그린뉴딜일 뿐이고 이명박식 저탄소 녹색성장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우리는 한국 정부의 성장지향성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실감한다. 그레타 툰베리가 미국의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하자고 말한 반면, 문재인 대통령에게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압박한 이유다.
이처럼 성장지향 기획을 1번에 올려놓고 그린뉴딜을 기형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 한국에서 이중위기(기후·불평등 위기) 극복을 위한 전망이 있을까. 무엇보다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제어하고 명실상부한 전환적 뉴딜을 추동할 사회적 동력은 어디서 이끌어낼까. 하긴 한국판 뉴딜이 재벌 대기업에 의존하는 색깔이 뚜렷한 마당에 이 같은 물음은 우문일지도 모르겠다.
위기 시대 그린뉴딜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살펴보던 중에 치열한 학술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사실도 알게 됐다. 현실 정치뿐만 아니라 학술 동향에서도 우리가 얻을 것은 많다. 그중 <급진 정치경제학 리뷰>(RRPE) 지상에서 벌어진 ‘글로벌 그린뉴딜 논쟁’이 주목할 만하다. 주인공은 폴린과 쇼어, 조건슨인데, 폴린은 그린뉴딜 또는 ‘평등주의적 녹색성장’론에 서 있고, 쇼어와 조건슨은 ‘탈성장' 또는 포스트성장론의 흐름에 서 있는 학자다. 폴린은 기후 안정화 대안이 현실성을 가져야 하며,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과 양질의 일자리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탈성장론에는 이 지점에 대한 대책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에너지전환 문제에 집중해 간단명료한 녹색성장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향후 20년 동안 석유·석탄·천연가스 소비가 급속히, 지속적으로 축소되어야 한다(35% 축소, 매년 2.2%). 이 과정에서 에너지 소비와 경제활동이 화석연료 소비와 절대적 탈동조화(경제가 성장하면서 화석연료 소비 절대량이 감소)되어야 한다. △매년 글로벌 지디피(GDP)의 1.5~2%를 에너지 효율성을 제고하고 재생에너지 공급을 확대하는 데 투자한다. 이 투자로 20년 내 전체 탄소 배출이 40% 감축될뿐더러 수백만 일자리가 창출되고 생활수준이 높아진다. △좌초되는 화석연료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와 지역사회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정의로운 전환이 실현되어야 한다. 새롭게 창출될 일자리의 질, 노동조건, 의사결정권 등의 문제는 미래로 열려 있다. △강력한 산업정책이 실행되어야 하고 금융, 세제 등 지원 조치가 따라야 한다. 낡은 공유, 사유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대안적 소유 형태를 실험해야 한다. △심각한 글로벌 불공정성 문제가 존재하지만, 대위기 앞에서 시간을 허비할 여유가 없으므로 현실적 대안을 찾는 게 낫다.
지면 관계상 쇼어·조건슨의 주장은 간단히 적는다.
△폴린의 대안은 에너지 전환에 국한되어 있을 뿐이며 발본적 구조개혁보다 기술적 변화를 중시하는 성장중심 접근이다. △정치적 실현 가능성을 말하지만, 온실가스 배출 감축을 위해 기득권 정치 지형이 얼마나 새롭게 변해야 하는지 생각이 모자란다. △성장중심 접근이 아니라 욕구중심·민중중심 정책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불평등·불균형·노동시간 단축의 세 분야에서 획기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절대적 탈동조화에 대한 폴린의 기대는 장밋빛 낙관에 치우쳐 있다. 에너지 효율이 좋아지면서 반등 효과로 에너지 소비가 증가하는 재생에너지 역설을 간과한다.
그린뉴딜 논쟁에서 양측은 서로 상대의 약점을 찌른다. 탈성장 측이 글로벌 지디피 축소가 가져올 대량실업과 생활수준 하락에 대해 마땅한 대안을 제시 못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린뉴딜이 각광을 받는 이유다. 하지만 폴린의 대안은 구조개혁론으로서 함량이 크게 부족해 보인다. 불평등, 삶의 양식 전환 문제를 뒷전으로 돌린 대안이 어디서 사회적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한국에는 사회적 뉴딜의 성격이 약한 폴린의 대안조차 한참 벽이 높다.
이병천 ㅣ 강원대 명예교수·지식인선언네트워크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