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실장의 방미와 같은 시기에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안보협의회의에서 양국 국방장관은 청와대의 기조와는 반대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청와대는 종전선언을 매개로 해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 프로세스의 불씨를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반면 국방장관은 북과 싸워보자는 강한 투지를 불태우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서재정 ㅣ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손가락이나 빨고 있지 말라.”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한 후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전격 발표했다. 매티스 당시 미 국방장관은 이 발표에 깜짝 놀랐다고 밥 우드워드가 <격노>에서 전한다. 매티스 장관은 대통령의 발표에 따라 그해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하기는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하려 했다. “군인들은 훈련하지 않으면 대통령 당신에게도 아무 가치가 없고 국방장관인 나에게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자 매티스 장관은 국방부에 와서 지시를 내렸다. ‘병영에 앉아 있지만 말고 훈련을 계속하라. 단지 대통령의 눈에 띌 대규모 훈련만 피하라.’ 손가락이나 빨고 있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일화는 트럼프 정부 대북외교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우선,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국방장관을 포함한 모든 부처가 통일된 협상안을 만들지 않았다. 한-미 군사훈련 중단이라는 중대한 사안에 대해 사전에 국방부와 협의하여 내부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매티스 국방장관이 깜짝 놀라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둘째, 정상회담 이후에 미 정부 부처가 정상 간 합의를 이행하는 데 저항했다는 사실이다. 정상 합의를 집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장관이 대통령의 눈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국방부를 지휘했다는 것은 개운치 않다. 그러니 대통령의 눈에 띌 대규모 군사훈련만 중단했지,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새로운 북-미 관계’나 ‘한반도 평화체제’를 이행할 조치들이 전혀 뒤따르지 않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물론 이런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주인이 대리인에게 일을 맡길 경우 주인과 대리인의 이해도 다르고, 또 주인이 대리인의 집행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어서 발생하는 ‘주인-대리인 문제'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는 이 문제를 잘 해결하고 있을까?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최근 청와대는 종전선언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총회 연설에서 종전선언을 제안했고, 서훈 국가안보실장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미 행정부 인사들을 연쇄 접촉한 후 ‘종전선언은 비핵화와 따로 놀 수 없다’며 이에 힘을 싣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서 실장의 방미와 같은 시기에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안보협의회의에서 양국 국방장관은 청와대의 기조와는 반대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청와대는 종전선언을 매개로 해서 한반도 평화와 번영 프로세스의 불씨를 살려보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반면 국방장관은 북과 싸워보자는 강한 투지를 불태우는 것과 같은 모양새다. 청와대와 국방부가 소통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서욱 국방장관은 제52차 한-미 안보협의회의 공동성명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폐기”를 위해 미국과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공약해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대원칙을 뒤집었다. 지금까지 남·북·미 3국 정상이 합의한 대원칙은 ‘한반도 비핵화’이고 이는 1990년대부터 있었던 모든 합의의 골간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합의한 ‘한반도 비핵화’를 국방장관이 ‘북한 비핵화’로 뒤집은 것은 정부의 위계를 흔드는 행위이자 한반도의 안정을 위협할 수도 있는 조치다. 여기에 덧붙여서 3국 정상 차원에서 합의된 바 없는 미사일 프로그램 폐기까지 국방장관들이 들고나왔다.
확장 억제를 제고하고 맞춤형 억제 전략을 이행한다는 공약은 이전의 공동성명에도 있었던 내용이지만 ‘북핵 비핵화’를 요구하는 의도를 확실하게 정책으로 뒷받침한다. 북에 대한 미국의 핵위협을 강화하고 북이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타격할 수도 있는 군사력을 구비하겠다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북은 핵무기를 폐기해야 하지만 한-미 군사당국은 핵무기를 포함한 군사적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일방주의가 청와대의 종전선언 추진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한-미 대량살상무기(WMD) 대응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증진하겠다는 데에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 한글 성명에서는 대량살상무기 ‘대응’ 능력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영문에서는 ‘카운터’ 능력으로 표현되고 있다. 미군 합참의 작전교리에 따르면 이 능력은 ‘대량살상무기 및 운송수단, 시설 등을 무효화하거나 파괴하는 맞춤형 능력’을 포함하고 있고, 동맹과의 협력이 성공 가능성을 높인다고 강조하고 있다. 즉 양국 국방장관은 북의 대량살상무기를 파괴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가능성을 두고도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알고 있는 것일까, 알고도 방기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