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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7월9일 사라진 변호사들

등록 2020-10-13 16:39수정 2020-10-14 02:40

박민희의 시진핑 시대 열전 _08
인권변호사 왕취안장의 아내 리원쭈가 2017년 7월7일 베이징 최고인민검찰원 밖에서 남편의 사진을 들고 그의 석방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베이징/로이터 연합뉴스
인권변호사 왕취안장의 아내 리원쭈가 2017년 7월7일 베이징 최고인민검찰원 밖에서 남편의 사진을 들고 그의 석방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베이징/로이터 연합뉴스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의 영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면서, 인민의 주체성과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는 철저히 통제하는 쪽으로 급속한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제국 통치의 역사에 인공지능과 생태정보를 이용한 21세기 첨단 감시가 더해지면서 중국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통제가 사회 구석구석을 뒤덮기 시작했다.

2015년 7월9일 새벽, 여성 변호사 왕위(王宇)와 남편, 15살 아들이 검은 옷의 남성들에게 끌려가 실종된 것은 긴 공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몇달 만에 중국 전역에서 인권변호사와 인권운동가 300여명이 공안에 체포됐다. 그들의 ‘죄’는 중국 당국이 불온시하는 이들을 변호하고 사법 정의를 요구한 것이었다. ‘709 대체포’로 불리는 이 사건은 ‘시진핑 시대’ 중국이 공산당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하고 강력한 불호령이었다.

체포된 변호사와 운동가들에겐 ‘국가정권 전복 선동’ 혐의가 적용됐다. 이들은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채 고통스러운 심문을 당했다. 2016년 8월 변호사 왕위가 외국 조직 등에 속아 국가정권 전복 행위를 했다고 강제 ‘자백’을 하는 동영상이 공개됐다. 이후 풀려난 왕위는 자신이 고문을 당했으며, 15살 아들이 자신 때문에 공안에 불려가 구타를 당하고 외지로 추방되는 등 극심한 괴롭힘을 당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폭로했다.

체포돼 심문을 받은 300여명 가운데 인권변호사 장톈융, 셰양, 리위한, 리허핑, 관영 언론이 알리지 않는 인권침해 문제들을 인터넷과 시위 등을 통해 전해온 운동가 우간 등 20여명이 국가정권 전복 선동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다른 이들은 가택연금, 출국금지, 구류, 변호사 자격 박탈 등을 당했다.

이들 중 왕취안장(王全章·44)은 가장 오랫동안 ‘실종’ 상태였다. 왕취안장은 지방정부와 부동산회사들에 억울하게 토지를 빼앗긴 사람들, 파룬궁 수련자 등을 변호해왔다. 2015년 8월3일 체포된 그는 2019년 1월24일까지 1300일 넘게 가족이나 변호사 등과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채 가혹한 심문을 받았다. 왕취안장은 끝까지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어떻게 국가전복죄가 되느냐”고 따졌다. 2019년 1월24일, 방청이 금지된 채 진행된 재판에서 톈진 제2중급인민법원은 그에게 국가정권 전복 선동 혐의 유죄로 4년6개월 형과 정치권리 5년 박탈을 판결했고 3개월 뒤 톈진 고급인민법원은 판결을 확정했다.

그의 아내 리원쭈(李文足)는 남편의 억울한 체포와 구금, 재판을 세상에 알리는 투사가 되었다. 그는 외국 언론들에 남편의 사연을 밝히고, 100㎞를 행진하며 남편과의 면회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체포된 다른 변호사의 아내들과 함께 삭발을 하면서 남편의 석방을 호소했다. 2018년 중국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리원쭈와 만난 이후 당국은 2019년 6월 리원쭈에게 왕취안장과의 30분 면회를 허용했다. 리원쭈는 고문과 가혹행위, 오랫동안 가족과의 연락도 차단된 불안 속에 마비된 것처럼 변해버린 남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2018년 5월 중국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투옥돼 있던 왕취안장의 아내 리원쭈를 만났다. 페이스북 갈무리
2018년 5월 중국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투옥돼 있던 왕취안장의 아내 리원쭈를 만났다. 페이스북 갈무리

2020년 4월5일 왕취안장은 4년6개월의 형기를 모두 마치고 출소했지만, 당국은 코로나19 방역을 이후로 그가 아내와 아들이 기다리는 베이징의 집으로 가는 것을 막고 산둥성 지난의 고향집에 그를 격리하고 감시했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국내외에서 비난이 일자, 당국은 그제야 그의 베이징행을 허용했다. 4월27일 그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 아들과 포옹했다.

돌아온 왕취안장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 벨레>, 일본 <교도통신> 등과 한 인터뷰에서 부당한 판결을 바로잡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그는 심문을 당하는 동안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 방에 갇혀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구타를 당하며 잠을 잘 수 없었고, 한달 동안 매일 거의 온종일 두 팔을 들고 있어야 했다고 털어놨다. “내가 겪은 일은 정말로 고통스러웠지만, 나는 동정받는 희생자로 보이길 원하지 않는다”며 “변호사로서 나는 법원이 법을 어기고 나에게 잘못된 판결을 내린 사건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싶다”고 말했다. ‘709 대체포’ 5주년을 맞은 지난 7월8일 그는 인터넷에 공개서한을 발표해 당국이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혐의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자신이 변호사로서 파룬궁 수련자들이 고문을 당한 데 항의하고, 외국인과 함께 인권단체를 설립해 홍콩에 기업 형태로 등록한 것, 언론 인터뷰에 응한 것을 당국이 기소장에서 국가정권 전복의 증거로 삼았다고 밝혔다. 그는 “보통 국가에서 ‘국가전복’이란 무장한 상태의 정권 전복 행위를 말한다”며 “변호사로서 행하는 업무를 정권 전복 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충격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자신을 심문하고 재판한 이들이 “자의적 구금과 기소, 유죄판결로 법의 원칙을 공공연히 훼손했다”며 “이들이야말로 사법제도의 파괴자들이며 법치국가의 적들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중국의 변호사와 인권운동가들이 특별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 헌법과 법에 규정된 인민의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가 진정으로 보장되기를 원할 뿐이다”라고 했다.

지난 4월27일 왕취안장이 석방된 뒤 베이징 집으로 돌아와 아내, 아들을 만나 활짝 웃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지난 4월27일 왕취안장이 석방된 뒤 베이징 집으로 돌아와 아내, 아들을 만나 활짝 웃고 있다. 베이징/AFP 연합뉴스

2015년 7월 인권변호사들은 왜 중국 당국의 대탄압 대상이 되었을까. 인권변호사들은 2000년 이후 조심스럽게 싹을 틔우고 성장해온 중국 사회 풀뿌리 시민운동, 노동운동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전국에 흩어진 운동들을 이어주는 그물 같은 존재였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 관영언론에서 보도하지 않는 소식을 전하려던 시민기자들, 탄압받는 소수민족들, 공산당이 금지한 지하교회(중국공산당이 통제하는 조직에 속하지 않은 교회)와 파룬궁 신자들, 토지를 빼앗긴 이들을 변호하고 억울한 이들의 사연을 세상에 알렸다. 이렇게 인권변호사들끼리 서로 연대하고 협력하면서 중국 전역에 네트워크가 만들어졌고, 시민운동 조직들도 이들을 통해 연대할 수 있었다. 천안문 시위 유혈진압 이후 중국 당국의 시민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탄압이었던 ‘709 대체포’는 인권변호사들의 네트워크를 궤멸시킴으로써 인권운동과 노동운동의 ‘암흑시대’를 예고했다.

후진타오 시대(2002~2012), 중국 당국은 사회의 둘레에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중국공산당에 직접 도전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시민사회의 성장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풀뿌리 시민운동,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강제철거와 환경오염에 대한 항의시위가 벌어지고, 중국이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가 나왔다. 많은 이들은 중국 사회 둘레의 ‘선’이 점점 확대되면서 좀더 포용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로 변해갈 것으로 기대했다.

시진핑 시대 들어 그 선은 급속히 좁아졌고 당국에 복종하지 않고 비판적인 의견을 말하는 이들을 옥죄는 올가미로 변했다. 중국 경제의 초고속 성장 시대가 끝나고, 미국과의 패권 경쟁으로 외부 환경이 악화되고,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 지도부는 통제 강화로 사회불안 요소를 원천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공산당과 시진핑 주석의 영도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조하면서, 인민의 주체성과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는 철저히 통제하는 쪽으로 급속한 방향 전환이 일어났다. 광대하고 복잡한 제국을 통치하는 절대권력이 필요에 따라 지방과 백성에 대해 풀어주기(放)와 통제하기(收)를 반복해온 중국의 역사 순환에서 통제 강화의 사이클이 시작된 것이다. 제국 통치의 역사에 인공지능과 생태정보를 이용한 21세기 첨단 감시가 더해지면서 중국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통제가 사회 구석구석을 뒤덮기 시작했다.

‘709 대체포’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변호사와 인권운동가들은 포기하지 않고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법학자이자 엔지오 활동가인 쉬즈융은 시진핑 주석이 코로나19 상황에 책임을 지고 하야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지난 3월에 다시 구금됐다. 왕취안장의 변호를 맡았고 사법·정치 개혁을 공개적으로 요구해온 위원성은 지난 6월 국가정권 전복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정권을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사법제도, 표현의 자유, 인권 보장, 역동적인 시민사회가 존재하는 중국을 희망한다. 고문이 없고, 어떤 피고인도 법적 조력을 받을 수 있고, 당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재판을 요구한다. 중국 당국은 이들이 외세와 결탁해 서구 사상을 추종한다고 비판하지만, 민주와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중국 현대사의 오래된 미완의 과제다. 1919년 반제국주의와 함께 민주와 과학을 요구했던 5·4운동의 과제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특권에 반대하고 공정한 사회를 요구했다가 반우파 투쟁에서 희생된 학생들, 문화대혁명 이후 정치 현대화를 요구했던 민주의 벽 운동, 천안문 시위를 거쳐 노동운동과 인권운동으로 이어져왔다.

‘709 대체포’의 피해자였던 인권변호사 셰옌이(謝燕益)는 7월9일 <홍콩 프리 프레스>에 쓴 글에서 “전체주의적 지배자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자원을 시민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쓰기보다는 사회 통제에 쓴다. 그들은 통제 또는 ‘안정 유지’ 시스템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첨단기술에 지치지 않고 투자한다. (…) 그런 전체주의 시스템 아래 살고 있는 개인으로서 나는 어떻게 그토록 강력한 통제에 저항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많은 개인들이 강력한 신념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의 국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그는 아직 희망을 붙들고 있다.

박민희 ㅣ 논설위원

논설위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를 공부했다. 중국 인민대학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한 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한겨레> 베이징 특파원으로 중국 곳곳을 다니며 취재했다. <중국을 인터뷰하다>(공저)를 썼고, <중국과 이란> 등의 책을 번역했다. ‘혐중’에 반대한다.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공정한 이해와 동행을 희망한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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