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면 공멸이다. 멸종의 위기에도 이윤 추구에 몰두하는 이들은 다 계획이 있다. 기울어지는 배에서 3등실은 이미 물에 잠겨 아비규환이어도 1등 선실에서는 돈 놓고 돈 먹기 꽃놀이판이 벌어진다. 이걸 막자고 국가가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 때 눈물 뚝뚝 흘리며 했던 다짐들, ‘이윤보다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우선’이란 깨우침은 벌써 잊힌 것인가?
이진순 ㅣ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어쩌다 이런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가족 친지들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차례를 지내고 송편을 빚어 이웃집에 돌리는 추석을 우리는 살아생전 다시 누릴 수 있을까? 마스크로 얼굴을 감싸지 않으면 바깥출입을 할 수 없고, 행여 스칠세라 거리를 두고 사람을 피해 다니는 게 우리 일상이 될 줄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1년 전에 우리에게 이런 공포영화 같은 일들이 닥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의 오늘은 조금 달라졌을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을 하나 들추자면, 그때에도 “치명적인 감염병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한 많은 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2002년 사스, 2009년 신종플루, 2015년 메르스가 발생 주기를 점점 단축하며 출현했을 때, 조류독감, 구제역, 아프리카돼지열병과 같은 가축 질병이 도처에 만연할 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이 만든 환경재앙이며 근본적인 삶의 전환 없이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거기서 멈췄다. 불길한 경고는 어김없이 현실이 되었고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똑같은 어리석음을 우리는 지금도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위기는 비상한데 대응은 심상하다. 정부는 지난 7월14일 ‘한국판 뉴딜종합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2025년까지 73조원을 투자해 일자리 65만개를 만들고 온실가스 1229만톤을 감축하겠다는 ‘그린뉴딜’ 구상도 담겨 있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탄소 의존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불평등 사회에서 포용 사회로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그러나 ‘근본적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접근 방식이 너무 재래식이다.
그린뉴딜에 새로움은 없다.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과 무엇이 다른가? 그린뉴딜이 질적인 차별성을 가지려면 ‘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었어야 했다. 그린뉴딜을 발표하는 자리에 대표기업으로 나온 현대차그룹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2025년까지 전기차를 100만대 판매하고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고 말한 것은 그린뉴딜의 철학과 작동 방식을 짐작하게 한다. 정부가 그린뉴딜을 주장하면서 석탄화력발전소 7기를 추가 건설한다든가, 공기업인 한전이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석탄화력발전소 투자를 강행하는 것은 산업적 이해관계가 국가적 탈탄소 전략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탄소경제에 의존해온 재벌기업이 재생에너지 산업에 진출하면 기후위기가 해결될까? 기업의 생존논리를 중심축으로 삼는 뉴딜이 대한민국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까? 그걸 바란다면 ‘그린’이란 말도, ‘뉴딜’이란 말도 쓰지 말아야 한다. 루스벨트의 1차 뉴딜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주를 이뤘지만 2차 뉴딜은 기업규제를 강화하고 복지를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자본의 탐욕적 확장에 제동을 걸고 국민의 생존과 안전을 우선하지 않는 것은 그린도, 뉴딜도 아니다.
기후위기는 전지구적 재앙이지만, 재앙의 강도는 균질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가장 연약한 이들이 가장 먼저 다치고 죽는다. <녹색평론> 발행인 고 김종철 선생은 한국의 1인당 에너지소비량이 미국 다음으로 높다는 점을 지적하며 전면적인 생태문명의 전환 없이 회복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당장 10년 뒤인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2010년의 절반으로 줄이지 않으면 멸종의 대재앙이 시작된다는 게 국제기구의 경고인데, 우리에겐 선언만 있고 로드맵이 없다. 이대로 가면 공멸이다. 멸종의 위기에도 이윤 추구에 몰두하는 이들은 다 계획이 있다. 적어도 그들은 가난한 이들보다 더 오래 살 것이다. 기울어지는 배에서 3등실은 이미 물에 잠겨 아비규환이어도 1등 선실에서는 돈 놓고 돈 먹기 꽃놀이판이 벌어진다. 이걸 막자고 국가가 존재한다. 세월호 참사 때 눈물 뚝뚝 흘리며 했던 다짐들, ‘이윤보다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우선’이란 깨우침은 벌써 잊힌 것인가?
덴마크의 자전거도로를 본 일이 있다. 교통수단 분담률 40%의 ‘자전거 천국’을 가능케 한 것은 도로 확장이나 대규모 토목공사가 아니었다. 기존 차도의 차선을 줄여 양방향의 자전거도로를 만들었다. 정체된 자동차들 옆으로 각양각색의 자전거가 씽씽 달리던 코펜하겐 풍경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이라도 우리 정부가 그린뉴딜을 위해 생활양식의 전면적 변화를 촉구한다면 나는 기꺼이 고분고분 따를 생각이다. 그 변화의 생경함과 불편함이, 종일 마스크를 쓰고 사람을 피해 다니는 지금의 음울한 불편함만큼이야 하겠는가. 아무리 급진적이어도 지나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