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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용석의 언어탐방] 패션: ‘옷은 옷일 뿐’이란 말은 틀렸다

등록 2020-10-06 14:38수정 2020-11-03 14:23

칸트는 유행이 사회화 과정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유행을 따르는 행위의 허영을 비판하면서도, “굳이 유행을 따르지 않으려는 태도보다는 차라리 유행에 미치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물론 유행에 미치는 것은 나쁘지만 유행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비사회적 태도가 더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ㅣ 철학자

가을은 패션의 계절이다. 낙엽과 함께 자연은 벗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은 한 벌 또 한 벌 더 입기 시작한다. 이왕이면 유행 따라 입기 시작한다. 봄과 가을 패션이 모두 중요한데, 가을 패션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것 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옷의 가짓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패션(fashion)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한 시기에 유행하는 의복이나 두발 등의 일정한 양식’이다. 이 안에는 유행과 양식이란 의미가 들어 있다. 즉 패션은 일정 기간 동안 유행하는 지배적인 양식이자, 그것에 사람들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동조하는 현상 그 자체이다. 그래서 ‘유행’이라고만 번역해서 쓰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이는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에서 패션에 상응하는 말로 양식의 의미에 좀 더 방점이 찍힌 모드(mode)와 모다(moda)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패션은 다수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일반적인 양식이지만, ‘새로움’을 전제로 한다. 즉 지속적으로 새로운 양식이 제시되고 선택되며 이에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을 말한다. 새로움이 지속적으로 제시된다는 것은 패션 그 자체가 변화의 흐름 속에 있음을 뜻한다. 이런 패션의 특성을 발터 베냐민은 ‘새로운 것을 향한 영원회귀’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 새로움은 미래를 향해 있기도 하지만 과거를 향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복고풍이 가능한 것이다.

유행하는 양식 또는 양식의 유행이라는 점에서 패션은 의복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 삶의 여러 분야에 적용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패션은 주로 ‘옷 입기’와 연관된 개념이었다. 여기서 ‘옷 입기’를 좀 더 확장하면 인간의 외모 가꾸기와 연관해서 입고(옷), 쓰고(모자), 신고(신발), 걸치는(장신구) 행위 등을 종합적으로 뜻한다. 이는 우리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옷 입기의 현상학’으로서 패션의 탐구는 중요하다. 250여년 전에 철학자 칸트도 인간의 모방적 욕구가 반영된 현상으로서 패션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사람들이 모방 행위가 주는 오락적 재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았다. 그래서 “유·무익성과는 관계없이, 최소한 남들만큼은 자신을 내보이려는 목적을 지닌 모방의 법칙이 패션”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오늘 우리 일상에 비춰보면, 사람들이 패션을 따르는 행위에는 즐거움이 동반되므로 이해관계에 그리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패션의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칸트에게 모방 행위 이론과 취향 이론은 밀접하다. 취향은 일정한 대상에 대한 개인의 ‘사회적 판단’이며, 취향에 따라 자신을 내보이려는 행위는 사회적 소통을 내포한다. 칸트는 유행과 취향을 연계해 사유함으로써 유행을 따르는 행위가 전적으로 수동적인 것도 전적으로 능동적인 것도 아님을 관찰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성향의 상호 관계에서 즐거움을 동반하는 사회화 과정을 경험한다고 본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칸트는 유행이 사회화 과정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는 유행을 따르는 행위의 허영을 비판하면서도, “굳이 유행을 따르지 않으려는 태도보다는 차라리 유행에 미치는 것이 더 낫다”고 한다. 물론 유행에 미치는 것은 나쁘지만 유행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비사회적 태도가 더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는 이런 태도에서 자기만 초연한 체하는 또 다른 허영을 본 것이리라.

칸트는 사회화 과정에서 관찰할 수 있는 패션의 이런 이중적 측면을 옷 입기의 차원에서 풍자적으로 표현한 필립 체스터필드의 말을 인용한다.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할지 걱정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하지만 옷을 잘 입지 못한 사람은 훨씬 더 바보 같다.”

이왕에 입는 옷, 잘 입으면 좋다. 여기서 ‘잘’이라는 부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길 수 있는데, ‘잘’ 입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사고와 풍부한 감수성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옷에 관해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대화든 토론이든 논쟁이든 기회가 있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의·식·주 가운데서 다른 동물들로부터 인간을 확연히 구분해주는 것이 바로 옷이기 때문이다. 먹지 않는 동물은 없고, 집을 짓는 동물은 많지만, 옷을 만들어 입는 동물은 없다. 진화론적으로 인간과 가깝다는 침팬지도 나뭇가지와 잎으로 잠자리를 만들기는 하지만 옷을 만들어 입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옷은 인간의 본질적 특징이며 ‘인간은 옷을 입는 동물’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이는 곧 옷의 탐구가 인간 이해의 통로라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옷과 연관하여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특별히 흥미롭다고 하는 것은 21대 초선 국회의원의 ‘별난’ 패션이 ‘별로’ 의미 있는 주목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패션은 양식에 방점을 찍고 하는 말이다. 이와 동의어인 스타일(style)이란 말이 더 친근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의복 스타일에는 개인의 스타일이 있고, 국회처럼 공동체의 구성인들이 공유하며 관습적으로 자리 잡은 스타일이 있다. 그런데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 ‘툭 불거진’ 옷차림으로 공식 석상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다른 구성원들의 반응은 무의미했을 뿐 아니라 무미건조했다. 일부 언론에서 이를 ‘도발적인’ 기사로 다루었을 뿐이다.

‘옷은 옷일 뿐’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것은 대단한 관용인지 아니면 귀찮아서 무시하는 건지 잘 모를 일이다. 일단 이 말은 틀렸다. 언급했듯이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고 비바람을 막기 위해 입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사회적 소통의 미디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기 싫지만’ 비판은 생략하고 그냥 모른 체하자는 기류도 있는 것 같다. 괜히 반대 의사를 표하면 시대착오적인 ‘꼰대’로 비칠까 봐 피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기회에 국회의원들의 의복 양식에 관한 대화를 재미있게 나누며 의미 있게 토론해보면 좋을 텐데 말이다.

우리가 패션에 대해 논하는 것은 패션 그 자체를 잘 알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이런 담론을 통해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옷 입기와 외모 가꾸기에 대해 가져왔던 그럴듯한 기만과 편견들, 그리고 그것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건전한 마음’ 또는 ‘도덕적 허영’을 살펴보기 위해서다. 권위 있는 가수가 소크라테스 형님을 소환하면 여러 정치인과 평론가 심지어 철학 교수까지 나서서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공인의 옷차림을 논하기 위해 코코 샤넬을 소환하면 누가 기꺼이 대화에 나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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