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경제위기가 와도 ‘통계상 고용’은 괜찮았다. 기존 일자리가 없어지면 거리에서 물건 파는 일과 같은 비공식 고용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비공식 일자리는 최후의 보루였다. 지금은 경제활동이나 이동을 규제하는 봉쇄조치들 때문에 비공식 일자리마저도 힘들다. 더이상 버티기 힘든 사람들이 수천만명에 이른다.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눈발 날리던 2월 말에 시작한 일이니, 벌써 6개월을 넘었다. ‘코비드-19’라는 이름이 세상에 선언되기 전이었다. 바이러스는 일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이미 큰 위협이었다. 그 위협과 충격을 가능하면 정확하고 신속하게 분석하는 게 책상물림으로 먹고사는 내가 할 일이었다. 한두달 간격으로 고용동향 분석 보고서를 내기로 했다. 그 후론 아침마다 통계를 보며 한숨 쉬는 게 나의 일상이다. 한국에서는 바이러스 신규 감염자가 두 자리냐 세 자리냐를 두고 걱정이지만, 한국 바깥에는 세 자리, 네 자리, 다섯 자리 싸움이다. 일자리 사정도 여전히 시계 제로인데, 계절만 서둘러 돌아온다. 내가 사는 곳의 뒷산에는 어제 눈이 왔다.
동향 분석의 시작이 온전히 ‘순수’하지 않았다. 바이러스가 세상을 덮치자, 나는 2007년에 시작된 금융위기를 떠올렸다. 세계적으로 대량 실업이 발생했고 회복은 더디고 힘들었다. 경제성장률은 제법 빨리 회복했지만, 일자리가 위기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는 데 10년 이상 걸렸다. 청년 일자리는 올 초까지도 여전히 ‘회복 중’이었다. 임금을 비롯한 노동소득의 회복은 더 느렸다. 겨우 회복했다는 소식만 간간이 들렸다. 금융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꼽혔던 불평등은 여전히 건재했다.
왜 그랬을까. 수백만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낙수(trickling down)라는 ‘신화’의 역할이 컸다. 금융이든 실물이든 경제가 성장하면 결국 모두 혜택을 받는다는 낙수효과는 금융위기 전에 맹위를 떨쳤고, 위기 후에는 맹렬한 공격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모든 신화가 그렇듯이 그 존재가 부정당한다고 해서 신화의 힘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당시 경제회복 정책은 여전히 경제성장이 곧바로 일자리와 노동소득으로 흘러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경제의 회복 기미만 보이면 곧이어 임금과 물가 상승을 걱정했고, 서둘러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노동력 부족으로 기업이 경쟁적으로 임금을 올려 노동자를 모셔오는 상황은 ‘오지 않은 현실’이었지만, ‘섣부른 걱정’은 곧 정책으로 연결되었다. 신화가 달리 신화이겠는가.
그래서 이번 위기는 다르길 바랐다. 방역 정책을 최우선으로 하되 회복 정책은 일자리와 노동소득에 집중했으면 했다. 이런저런 걸 하면 결국 좋은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하지 말고, 일자리를 회복 정책의 중앙에 두고 이런저런 정책이 일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지를 따졌으면 했다. 그러려면 ‘여기요, 여기요’ 하면서 열심히 떠들 수밖에 없다. 정책의 칼자루를 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숫자를 사랑한다. 그러니 나도 숫자를 사랑하고 따져야 했다.
숫자는 우울하고도 복잡하다. 통상적인 경제위기라면 실업만 따지면 되지만 현재의 다층적인 위기는 일자리 사정도 복잡하게 만들었다. 고용 상태는 유지하지만 일하는 시간을 줄인 사람이 많았고, 심지어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의 기업이나 노동자에게 금전적 지원이 따르기도 한다. 이들은 통계상으로는 종종 ‘고용’으로 분류된다. 또다른 한쪽에는 경제활동을 포기한 사람이 있다. 일자리를 잃었지만 새로 찾기는 힘들기 때문에 아예 구직을 포기한 사람들인데, 공식통계상으로 이들은 ‘실업자’가 아니다. 통계상 실업은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기 때문이다. 실업은 빙산의 일각인 것이다.
그래서 일자리 위기의 실상은 ‘실업’보다는 ‘노동시간 손실’을 통해 더 잘 드러난다. 바이러스 대책으로 선진국들이 봉쇄조치를 도입했던 초봄에는 비관적이지만 약간의 희망도 있었다. 초반 6개월 동안 10%를 넘나드는 노동시간 손실이 있겠지만 하반기에는 더디지만 조금씩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추정치는 시간이 갈수록 나빠졌다. 6월 들어 선진국을 중심으로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자,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인도 상황은 계속 어려웠다. 게다가 한숨 돌린 선진국은 여름휴가를 지나면서 다시 어려워졌다. 신규 바이러스 감염자 숫자와 사망자 숫자를 보면 전세계 상황은 도돌이표다. 방역 관련 규제조치도 국가적 단위에서는 빈도가 낮아졌지만, 특정 지역이나 계층을 겨냥한 조치들은 여전하다. 지난 몇주 동안 긴박했던 한국 상황도 세계적으로 보면 ‘양호’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노동시간 손실 추정치를 이번주에 수정 발표했다. 2사분기 추정치는 17%가 넘는다. 일주일에 48시간 일하는 일자리로 환산하면, 5억개의 일자리에 해당한다. 노동소득은 11% 정도 줄었다. 평균이 그렇다는 얘기다. 소득 상위층은 위기 중에도 상대적으로 손해를 많이 보지 않았다. 저소득층의 소득 손실이 훨씬 컸다.
향후 전망도 그다지 좋지 않다. 우리도 4사분기 전망을 하향 조정했다. 일부 전문가들이 걱정하는 바이러스 2차 파동이 온다면, 다음 석달의 일자리 상황은 2사분기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유럽에서는 여름휴가로 인한 ‘깜짝 회복’은 사라지고, 서비스 분야는 현저히 나빠졌다. 여행 관련 추세는 답답할 정도로 정체되어 있다. 채용공고도 줄었다. 유럽에서 그나마 선방하고 있는 독일에서는 채용공고가 20% 이상 줄어 있고, 영국의 경우는 반토막이 난 상태다.
이런 어려운 사정마저도 그나마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 덕분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정부의 적극적 재정 운영은 파국적 상황을 막았다. 재정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1% 정도 늘리면 노동시간 손실은 0.8%포인트 줄어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세계적으로, 평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이것도 그나마 잘사는 나라들 얘기다. 개발도상국에 가면 상황은 아슬아슬하다. 방역의 실패와 함께 노동시장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예전에는 경제위기가 와도 ‘통계상 고용’은 괜찮았다. 기존 일자리가 없어지면 거리에서 물건 파는 일과 같은 비공식 고용에 항상 의존했기 때문이다. 비공식 일자리는 최후의 보루였다. 이 때문에 경제위기인데도 ‘통계상 고용’은 늘어가는 기현상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활동이나 이동을 규제하는 봉쇄조치들 때문에 비공식 일자리마저도 힘들다. 더이상 버티기 힘든 사람들이 수천만명에 이른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비공식 부문 종사자의 소득이 60% 이상 줄어든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데 정부의 재정적 여력은 제로에 가깝고 정치도 어지럽다. 이래저래 쌓인 빚을 갚기도 버거우니, 대규모 소득 지원정책은 요원하다. 선진국 도움의 손길은 멀고, 국제금융기구들이 부채 상환을 연기하거나 청산해주는 것도 아직까지 말의 성찬일 뿐이다.
풍성해야 할 추석날, 저 바깥은 상실을 추수하는 황량한 빈 들판임을 기억하려 한다. 다시 우박이 쏟아진다. 나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