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우 ㅣ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개미, 나리, 장미, 노루, 제비…. 흔한 동식물 이름이지만 태풍 이름이기도 하다. 원래 태풍은 이름이 없었다. 한 지역에 발달한 여러 개의 태풍을 구분하기 위해 일련번호나 별명을 붙였다. 처음 별명을 붙인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호주)의 예보관들이었다. 당시엔 싫어하는 정치인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만약 정치인 스미스를 싫어한다면 “스미스가 심각한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식으로 예보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태풍에 이름을 부여한 것은 미국 공군과 해군이었다. 이때만 해도 그저 자신의 아내 혹은 애인의 이름을 사용했다. 그래서 1978년까지 기록된 모든 태풍은 여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말을 비롯해 아시아·태평양만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과거 태풍의 이름을 붙일 때, 태풍의 어원은 고려하지 않던 것 같다. 태풍은 16세기 유럽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중국에서 강한 바람을 뜻하는 대풍(大風)이 아랍어로 쓰였고 이것이 유럽으로 전해져 태풍이 되었다고 한다. 이때 영어식 표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티폰’에서 유래됐다. 티폰은 상반신은 인간이지만 하반신은 뱀인 거대한 괴수로, 불을 뿜으며 신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거친 폭풍들과 여러 괴물들의 아버지로 기록되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태풍의 한자 표기(颱風)는 일제 강점기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물론 태풍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다만 시대별로 한자 표기가 다소 달랐다. 여기서 태(颱)는 ‘태풍 태’, 뜻을 나타내는 ‘바람 풍(風)’과 음을 나타내는 ‘별 태(台)’로 구성된 한자다. 이 한자는 오직 태풍을 표기하는 데만 사용된다. ‘클 태(太)’를 써도 될 법한데 바람에 바람을 더해 ‘颱風’으로 표기하였다. 흥미롭게도 이 한자 표기는 한국에만 있다. 중국과 일본은 ‘台風’으로 표기한다. 일제 강점기에 소개된 한자 표기가 정작 일본에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쓰이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도 올해는 태풍의 피해가 크지 않았다. 역대급 장마 직후, 태풍이 연이어 한반도로 접근하면서 큰 풍수해 우려가 있었다. 태풍은 보통 7~9월 사이 많이 발생하는데, 올해는 특이하게도 7월 태풍이 없었다. 이 때문에 8월에 태풍이 빈번할 것으로 예상됐고, 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평소보다 많은 7개의 태풍이 발생했고 이 중 일부가 한반도로 거의 직진했다. 특히 8월 말부터 9월 초까지 태풍 바비, 마이삭, 하이선이 연이어 상륙했다. 다행히도 이동 경로가 어느 정도 예측되고, 여러 대비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올해는 이렇게 태풍 시즌이 끝났다. 10월에도 태풍은 발생하지만, 한반도로 상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연이은 태풍으로 올해 유독 태풍이 많았던 것 같은 착각이 들 수 있다. 통계를 보면 지난 1981~2010년 아시아·태평양에는 연평균 26개의 태풍이 발생했고 3개 내외가 한반도에 상륙했다. 최근 10년간도 연평균 26개의 태풍이 발생해서 4개 안팎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올해는 평년에 비해 태풍 개수는 오히려 적었고, 평년과 비슷하게 3개의 태풍이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태풍은 지구온난화의 영향을 받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태풍의 개수에는 큰 변화가 없지만 태풍의 강도에는 뚜렷한 변화가 관측되고 있다. 기상청 일최대순간풍속 자료를 토대로 1951년 이후 모든 태풍의 강도를 살펴보면, 가장 강력했던 태풍 10개 중 8개가 2000년 이후에 발생했다. 여기에는 작년에 발생했던 태풍 링링과 올해 태풍 마이삭도 포함된다. 전문가들은 이와 같은 추세가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즉 태풍의 강도는 미래에 더 강할 수 있다. 어쩌면 지구온난화가 태풍을 정말 티폰으로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