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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택배 노동자들이 화났다

등록 2020-09-22 16:52수정 2020-10-19 10:14

기업과 정부가 “심야배송을 금지하고 휴식시간을 보장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상징적 선언을 하고, 국토교통부가 “추석 연휴를 앞두고 분류작업에 필요한 인력을 한시적으로 충원할 것을 택배사들에 권고”하고, 대통령이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당부”하는 것으로 문제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늦은 밤 시간에 택배를 현관 앞에 배송했다는 휴대폰 문자가 들어왔다. 문을 열고 내다봤지만 택배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문자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음성만으로도 나이가 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택배기사가 말한다. “밤 12시 이전까지 배달을 해야 제가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어서요… 꼭 갖다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말은 택배기사가 자영업자가 아니라 규제받는 노동자라는 뜻이다. 택배 회사나 플랫폼 기업이 주장하는 것처럼 택배 노동자가 ‘자영업자’라면 몇분 사이에 ‘수수료’가 줄어들까 봐 걱정해야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한국에 와 있는 외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배달 천국’이라면서 그 편리함에 놀라곤 한다. 반면에 우리가 외국에 나가 살게 되면 택배가 하루 만에 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고, 해가 지면 밥 먹을 식당이 없어서 불편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감수한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의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 그 노동자들에게도 가족과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 낮 시간 동안 일하고 받는 임금만으로도 충분히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사회의 공감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북유럽 한 나라의 코로나19 상황 통계가 며칠 동안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지 않았다. 그 나라에서 공부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말한다. “담당 직원이나 공무원이 휴가를 갔기 때문일지도 몰라.”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말을 보탠다. “그렇지. 그 나라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적은 비용으로 편리한 서비스를 받을 때마다 좋아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다른 사회와 비교할 때 ‘사람값’이 너무 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은 아닌가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지난 8월14일 택배기사들이 28년 만에 처음으로 ‘택배 없는 날’ 휴가를 맞았다. 다행스럽게도 ‘택배 주문하지 않기’ 운동 등으로 호응한 소비자들도 꽤 많았다. 택배 노동자가 하루를 쉬려면 그 사람 일감을 다른 택배기사들이 나눠 담당하거나, 대신 일할 사람을 직접 구해야 한다. 모두 같이 쉬는 날이 만들어지면 다른 사람 일거리를 떠안지 않아도 되고, 대신 일할 사람을 구해야 하는 부담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렇지만 휴가 결정에 참여한 5개 대기업에 포함되지 않는 중소 택배업체에서는 쉬지 못해 박탈감을 느끼는 노동자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1년에 사흘을 쉬었다고 택배기사들의 노동조건이 개선될 리는 없다. 휴일이 끝나자마자 예전과 다름없는 고된 업무에 투입돼 과로 상태의 노동에 시달리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올해 상반기만 해도 12명의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했다는 것이 관련 단체들의 주장이다.

과로사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추석 연휴를 앞두고 21일부터 전국 4천여명의 택배 노동자가 ‘공짜노동’이라 불리는 택배 분류작업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가, 하루 평균 1만명의 인력을 추가 투입하겠다는 정부와 업계의 방침에 따라 철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하루 13~16시간의 노동시간 중 절반을 분류작업에 매달리면서도 단 한푼의 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는 택배 노동자들의 주장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기업과 정부가 “심야배송을 금지하고 휴식시간을 보장하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상징적 선언을 하고, 국토교통부가 “추석 연휴를 앞두고 분류작업에 필요한 인력을 한시적으로 충원할 것을 택배사들에 권고”하고, 대통령이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당부”하는 것으로 문제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택배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휴식을 보장하지 않는 기업은 엄격히 규제하는 대책을 마련하고, 택배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설립해 회사와 노동조건을 협상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법을 개정하고, 택배 및 배달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상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노동자로 분류될 수 있도록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고, 중대재해를 발생시킨 기업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을 할 수 있도록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고, 20대 국회에서 발의됐다가 폐기된, 노동자들이 흔히 ‘택배법’이라고 부르는 ‘생활물류서비스산업발전법’을 대폭 보완해 택배 및 배달 노동자들이 산재보험 등 4대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택배 회사들이 분류업무 담당자를 별도로 고용하도록 법규에 명시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질 것이 분명한 택배 및 배달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사회가 어떻게 “사람이 먼저”인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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