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1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대정부질문에서 발언대로 향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봉현 |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1990년대 초만 해도 뉴스 하면 사회부 사건 기사였다. 간밤에 일어난 살인, 강도, 패싸움 같은 사건·사고 기사가 아침 신문의 사회면이나 1면 머리에 시커먼 제목으로 실리곤 했다. 기자들은 이런 기사에서 이른바 ‘물먹지’ 않으려고, 서울을 동서로 나눠 경찰서를 순회하는 야근을 매일 했다. 새벽에는 큰 병원 응급실과 장례식장을 돌며 혹시 형사들이 감춘 사건이라도 있는지 훑고 다녔다. 사건·사고에 ‘과몰입’하는 보도 관행은 기자가 쓰지 못하는 영역이 많았던 권위주의 시절의 유습이었다. 민주화로 정치권력과 정부 비판이 자유로워지고, 복잡한 경제·사회 이슈가 많아지면서 뉴스에서 사건·사고 기사의 비중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시대에 따라 뉴스도 달라져야 하지만, 도돌이표가 반복되는 보도 패턴이 있다. 바로 정치인과 고위공직자가 연관된 공정의 이슈를 다루는 보도들이 그렇다.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보도에서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군 휴가 보도에 이르기까지 그런 뉴스의 역기능이 도드라지고 있다. 주요 공직자의 가족, 병역, 재산형성 등에 법적, 도덕적 문제가 없는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살펴보는 것은 언론의 책무이다. 하지만 원칙 없이 ‘과몰입’해 막장드라마 같은 뉴스를 쏟아냄으로써, 국민을 ‘욕하면서 보는’ 시청자화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추 장관의 아들이 ‘엄마 찬스’를 활용해 어떤 특혜를 누렸는지는 규명할 만한 사안이다. 그렇다 해도 몇몇 보수 신문이 주도한 것처럼 한 젊은이의 군 휴가 문제를 바닥까지 긁어 한달 가까이 다른 현안을 덮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사안의 경중을 무시하는 언론의 이런 행태는 결국 21대 첫 정기국회 대정부질문 나흘이 추 장관 아들 공방으로 유실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코로나19 방역, 취약계층의 생활고, 기후위기, 미-중의 패권 다툼 등 한국 사회가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난제가 한둘이 아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엄마가 나간 사이 빌라에 불이 나 중화상을 입은 인천 초등학생 형제의 비극은 “지금 무엇이 중하냐”를 묻고 있다.
보도 방식도 구태의연했다. 야당의 폭로와 추 장관 쪽의 반박, 관계자의 말을 따옴표로 옮기기 바빴다. 주장들은 날것 그대로 기사화됐고, 사실 여부를 확인해 언론 자신의 목소리로 가닥을 잡아가는 기사는 드물었다. 대신 “소설 쓰시네” “안중근 의사의 말을 몸소 실천한 것”같이 지엽적 말실수를 대서특필해 독자의 감정선을 자극했다.
표창원 전 민주당 의원은 19일치 <한겨레> 연재물 ‘여의도 프로파일링’에서 “정의와 공정 문제에 봉착한 정치인이 자기편을 동원하고 선동해 개인 문제를 ‘진영싸움’으로 전환시키는 현상”이 한국 정치의 심각한 문제라고 썼다. 그런데 정치인 못지않게 대한민국을 ‘정의와 공정의 상설 전투장’으로 만드는 것이 언론이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스스로 정치판의 ‘선수’로 나선 언론이 ‘때에 전’ 문법으로 정의와 공정에 톱스핀을 걸어 진영싸움을 점화한다. 종종 내로남불의 이중 잣대까지 곁들인 이런 유의 뉴스가 낳는 것은 극단적 정치 혐오와 언론 불신이다.
뉴스가 늘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여러 변화의 시도들이 있다. ‘지혜의 저널리즘’은 사실을 중계만 하지 말고 의미, 맥락, 통찰을 더하라고 권한다. ‘솔루션 저널리즘’은 문제를 드러내는 것을 넘어 그런 상황을 개선하려 노력하는 사람과 과정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한다. 2013년 창립해 연 63달러를 내는 6만여명의 독자를 확보한 네덜란드 온라인 매체 ‘코레스폰던트’의 성공에서도 참고할 게 있다. 이 회사 대표인 로프 베인베르흐는 “지난 200년간의 뉴스가 대체로 감각적, 예외적, 부정적이고 이벤트 지향적이었다”며 나날의 사건, 폭로, 비극 뒤에 흐르는 패턴에 주목해 세상이 실제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겠다 한다. ‘날씨가 아니라 기후’라는 이 회사의 슬로건은 뉴스를 재정의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모색들이 한국 언론에도 자극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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