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그려, 콜레라 조심하고.” 어머니는 오늘도 코로나바이러스라는 긴 이름 대신에 콜레라라고 했다. 벌써 몇번 제대로 된 이름을 고쳐서 알려드렸으나, 매번 친숙한 이름 콜레라로 돌아갔다.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할까. 세상의 역병은 이름만 다를 뿐 늘 같았고, 전염병이 빚어낸 인간의 모습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전세계적으로 바이러스로 죽어간 사람의 수는 가을비 내리는 오늘이나 꽃망울 터뜨리던 초봄이나 별다르지 않다. 어쩌면 나는 이름에 얽매이고, 어머니는 본모습만 보는 것이리라. 오늘은 부러 이름을 고쳐서 알려드리지 않았다.
올봄에 불티나게 팔렸다는 카뮈의 고전적 소설 <페스트>의 배경도 실은 콜레라다. 알제리의 도시 오랑이라는 곳에서 19세기 중반에 생긴 일을 소재로 삼았다.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선언되자, 상술 좋은 사람들이나 글 소재가 궁색한 이들은 앞뒤를 따지지도 않고 “페스트”에 대해 적었다. 나는 시큰둥했다. 2차 대전 직후에 이 책이 나왔을 때 대중적 인기는 대단했으나, 당대의 지식인들은 비판적이었다. 정치적 책임을 묻거나 ‘혁명적인’ 메시지가 없다며 불평을 쏟아냈다. 그런데, 지금은 지식인들이 나서서 카뮈 ‘장사’에 나서는 모습이 좋지 않았다. 카뮈는 역병의 공포와 함께 ‘성찰’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드디어 틀렸구나 했다.
내가 시큰둥했던 이유는 또 있었다. 올봄만 하더라도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냥 왔다가 언젠가는 떠나게 될 불쾌한 방문자”라고 생각했다. 경제와 일자리에 있을 중단기적 영향을 더 염려했다. 페스트가 닥치자, 페스트 이후의 삶을 상상한다고 분주했던 오랑 시민의 마음과 똑같았던 셈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떠올랐다. 역병이 물러나서 시민들이 거리에서 환호하고 기뻐하지만 그들은 역병이 사라지지 않고 다시 돌아올 것을 알지 못한다고 썼다. 1년에 걸친 사투를 담담하게 묘사한 소설의 끝 구절로는 잔인했다. 듣고 싶지 않은 말, 나는 애써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페스트>를 다시 꺼내 읽는다. 바이러스 시대는 길어지고 그 끝은 아직 보이지 않고, 인간은 불안한 만큼 분열하고 있다. 광화문에 수만 명이 하느님을 찾아 나섰고, 카뮈의 ‘군상’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한때 과장됐다고 생각했던 카뮈의 말이 맴돈다. 역병이나 전쟁이 들이닥치면 우린 속수무책이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이 어찌 오래가겠어, 라면서. 하지만 전쟁은 어리석다고 중단되지 않는다. 어리석음은 항상 끈덕진 법이다.
소설에서 오랑 시민을 역병의 공포에 몰아넣는 계기는 두어번 있다. 첫번째는 페스트라는 역병의 존재를 인정한 순간이었다. 시민들은 걱정하고 전문가는 의심했지만, 누구도 ‘페스트’라 말하지 못했다. 죽음의 소문과 숫자가 떠돌 때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숫자에 이웃이나 가족들이 포함될 때에야 사람들은 역병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숫자는 너무나 추상적이라서, “최소한 아는 얼굴들을 익명의 시체 더미 위에 올려놓을 수 있어야”만 현실이 된다. 그제서야 도시는 봉쇄되고, 사람들은 격리된다.
두번째 계기는 ‘투사적인 예수교도’ 파늘루 신부의 설교다. 사람들이 “왜, 여기에, 우리가?”라고 물었지만, 누구도 답하지 못한다. 비가 쏟아지던 일요일, 중간 키에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진 신부는 궁극의 답을 찾는 시민들에게 선언한다. “형제들이여, 재앙이 왔도다. 그리고 형제들이여, 당신은 이 재앙을 받아 마땅하도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페스트는 그분이 사랑하는 방식이며, 이를 통해 그분은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려 한다. “출애굽기”에서 페스트는 신의 적을 물리치기 위한 방식이었듯이, 역병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영생의 길인 것이다. 역병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지 말 것이며 애써 멀리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죽음마저도 두려워 말라 한다. 신부는 ‘당당한 위로’의 말을 전했으나, 시민들의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래서 성경의 말씀보다는 부적을 찾았다.
신부의 설교는 소설의 주인공인 의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도시 밖에서 죽어가는 아내를 홀로 남겨 두고 온몸으로 역병과 싸우는 인물이다. 이 싸움은 병의 불확실성과 싸움이자, 인간의 날 선 욕망과 시퍼런 편견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신부의 말과도 싸웠다. “인간의 구원이란 저에게 너무 거창한 말이다… 나는 그저 인간의 건강을 염려하고 그걸 최우선으로 삼을 뿐이다.” 구원을 이유로 눈앞의 생명에 눈감을 수는 없었다.
한 아이의 죽음으로 이 불화는 정점에 달한다. 발병 때부터 아이의 고통과 사투를 보아온 의사는 혈청주사마저도 아무런 효과도 없자 절망한다. 가망 없는 싸움에 패배하고 아이는 죽어간다. 아이의 죽음은 째깍거리는 초침처럼 다가오고, 의사는 아빠의 소식을 묻는다. 그가 격리수용소에 있다는 답만 돌아온다. 부를 사람이 없다. 아이의 외로운 마지막 비명은 모든 고통받는 자들이 같이 쏟아내는 소리 같다. 신부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한다. 의사는 신부에게 묻는다. 저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나요.
신부는 잠시 흔들리지만, 곧 두번째 설교를 한다. 썰렁해진 성당에서 그는 페스트가 신의 뜻임을 다시 선언한다. 그 후, 그도 앓아 쓰러지지만, 의사를 부르지는 않는다. 신부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죽고, 의사는 사인을 페스트라고 특정하지 못한다. 병명 미상.
늦은 여름비가 쏟아지는 날, 책을 덮는다. 역병의 시대란 “낮이고 밤이고 어느 인간이나 비겁해지는 시간”이다. 두려움과 공포와의 싸움이다. 부유한 자는 부족함이 없었고, 가난한 자는 기댈 곳이 없다. 누군가는 떼돈 벌 궁리도 하고, 또 누군가는 도시를 홀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의사 리외는 늘 흔들리면서도 굳건했다. 그래서 종교와 거침없이 불화한다. “성자들보다는 패배자와 더 연대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념과 이해를 자양분으로 삼는 영웅주의와도 멀리하면서, 그의 눈은 오직 “단 한 명의 인간”에만 향해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종교적인’ 사람은 의사 리외다. 그는 왜 역병과의 싸움에 자신이 나서야 하는지를 묻고 고뇌한다. 답을 멀리서 찾지 않았다. 답답해서 창문을 열자, 도시의 소음이 몰려왔다. “가까운 공장으로부터 짧게 반복되는 날카로운 기계톱 소리” 그 소리에서 그는 깨닫는다. 인간의 확신은 확성기를 통해 터져나가는 ‘구원의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저 “매일매일의 노동”에 있다. 그리고 그 노동이 가져다주는 ‘구원’.카뮈는 말한다.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일 수 없다.” 콜레라 시대에도 유효한 얘기이고, ‘코비드19’이라는 암호명 같은 이름을 가진 바이러스 시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