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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손석우의 바람] 역사를 바꾼 태풍

등록 2020-08-30 17:48수정 2020-08-31 12:48

손석우 ㅣ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8월 중순까지 집중호우로 큰 피해를 입었는데, 피해 복구가 채 마무리되기 전 강력한 태풍이 북상하면서 전 국민이 밤잠을 설쳤다. 다행히도 제주도 및 서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또 다른 태풍이 한반도로 북상할 수 있다니 아직 경계를 늦추면 안 될 것이다.

태풍은 여름철 일상적인 현상이지만, 간혹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략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태풍으로 인해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일본과 본격적인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퇴각해야만 했다. 1274년 1차 전쟁과 규모가 더 컸던 1281년 2차 전쟁 모두 태풍에 의해 여몽연합군은 퇴각했다. 일본한테는 그야말로 신이 일으킨 바람이었고, 당시 태풍을 신풍(神風)이라 불렀다. 안타깝게도 이는 2차 세계대전 중 악명을 떨쳤던 일본군 가미카제(신풍의 일본어 발음)의 어원이 되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태풍의 덕을 크게 본 적이 있다. 1944년 12월 종전을 얼마 앞둔 겨울, 미 해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 루손섬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전 준비를 위해 해상 급유가 필수였으나, 갑자기 강해진 바람으로 인해 급유 자체가 어려웠다. 잠시 대피할 잔잔한 바다가 필요했고, 함대의 이동은 기상학자의 조언을 따라 결정됐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관측 자료 자체를 확보할 수 없었다. 필리핀 근해 태풍이 북서진한다는 경험적인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강풍이 태풍 ‘코브라’(독사의 이름이 붙여졌다) 때문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태풍이 접근하면 큰 너울이 만들어지는데 이 너울은 태풍의 진행 방향으로 전파된다. 그러나 당시 파도는 남동쪽이 아니라 북동쪽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바람 방향도 전형적인 태풍 전조와는 달랐다. 이에 기상학자는 강풍이 태풍 때문이 아니라 한랭전선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미 해군에는 고성능 레이더가 있었으나 이를 활용할 만한 기상학적 지식이 없었다. 세계 최초로 태풍을 관측한 레이더 영상은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 결국 함대는 동진하는 한랭전선을 피해 북서진했다. 이때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다음날 바다가 잔잔해지자 한랭전선이 지나간 것으로 판단한 함대는, 방향을 바꾸어 작전 지역으로 남동진하고 만다. 북서진하고 있던 태풍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던 것이다.

항로를 잘못 잡은 대가는 참혹했다. 풍속은 시속 200㎞에 육박했고 파도는 25m를 넘나들었다. 항공모함과 대규모 군용선은 그나마 나았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호위함과 폭이 좁은 구축함은 높은 파도와 강한 바람을 견디지 못했다. 큰 배들도 손상을 피할 수 없었는데 배수량이 5만톤에 이르는 전함이 급류의 카누처럼 흔들렸다고 한다. 3일 후 구조 비행기가 도착했을 때에야 미군은 피해 규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구축함 3척이 침몰했고, 항공모함을 포함해 20여척의 함정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했고, 790여명이 사망했으며 146대의 함재기가 손망실됐다. 이는 1942년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미국과 일본이 입은 피해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큰 피해였다.

일본한테 태풍 ‘코브라’는 20세기 신풍이었던 셈이다. 반면 미국한테는 악마의 신이었다. 대서양에서는 태풍을 허리케인이라고 부른다. 이는 중앙아메리카 인디언어 후라칸에서 유래한 것으로 ‘악마의 신’을 의미한다.

미 해군은 종전 후 태풍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945년 태풍추적센터를 설립했고 1959년부터는 합동태풍경보센터로 확대해서 태풍을 연구하고 있다. 하와이에 있는 이 센터는 매일 전세계 태풍을 관측하고 예측한다. 세계 최고의 태풍 예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60년간의 끊임없는 연구 산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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