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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거리의 칼럼] 나 때는... / 김훈

등록 2020-08-24 04:59수정 2020-08-24 07:26

나 때는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였는데, 지금은 3만달러가 넘는다. 나 때는 학교에서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고 가르쳤다. 이걸 노래로 만들어서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합창했다. 나 때의 ‘아는 것’은 국영수를 말했고, ‘배움’은 ‘먹고살아야 한다’는 비통한 운명과 직결되어 있었다. 학교의 현실은 지금도 별 차이 없다.

나 때는 개천의 용을 숭상했다. 빛나는 개천 용들의 생애와 성취를 외웠고 시험문제로 나왔다. 국영수는 용의 자리에 오르는 사다리였다. 용과 사다리만을 가르쳤고, 개천의 발원지나 유역, 수질은 가르치지 않았다. 이 개천은 물질적 결핍뿐 아니라 멸시, 천대, 정보의 차단, 기회의 박탈, 범죄의 유혹, 희망의 부재들을 다 합쳐서 흐른다. 나 때의 개천은 역사 속을 흘러서 내려왔고, 지금의 개천은 제도와 구조 속을 흘러서 간다. 앞흐름이 뒷흐름을 이끌면서 개천은 연면히 흐르고 폭우가 쏟아지면 홍수로 넘친다.

나 때는 졸업식 때 동네 경찰서장, 반공단체 대표, 퇴직 관리들이 축사를 했는데, 지금은 첨단 벤처기업으로 성공한 용들이 연단에 오른다. 나 때는 국가경제가 한 움큼이고 산업이 보잘것없어서 거리와 다방에 실직자가 넘쳤는데, 지금은 거대기업이 번쩍거려도 실직자가 늘어난다. 나 때는 해마다 보릿고개에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밥 벌려고 일하다가 일터에서 죽는 사람이 많다. 나 때는 뇌염, 장티푸스, 독감이 돌면 며칠씩 휴교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몇만배 더 무서운 역병이 돌아서 학교는 몇달째 제대로 문을 열지 못한다.

지금은 나 때가 아닌데, 나 때가 계속되고 있으니, 늙어서 이런 글을 쓰는 일은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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