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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삶의 창] 오취리를 향한 악플의 역설 / 김소민

등록 2020-08-21 15:51수정 2020-08-22 02:34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는 지난 4일 방영된 제이티비시 <말하는 대로>에 출연해 한국에서 경험한 인종차별 사례를 들려줬다. 사진 제이티비시 화면 갈무리
가나 출신 방송인 샘 오취리는 지난 4일 방영된 제이티비시 <말하는 대로>에 출연해 한국에서 경험한 인종차별 사례를 들려줬다. 사진 제이티비시 화면 갈무리

샘 오취리가 “대한민국”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사과하는 장면은 참혹했다. 의정부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가나의 춤추는 상여꾼을 패러디했는데 그가 “굳이 얼굴 색깔까지 칠해야 했나, 흑인들 입장에선 매우 불쾌한 행동”이라고 지적한 뒤다. 오취리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영어로 쓴 다음 문장이 뇌관을 건드렸다. “한국에서 다른 문화를 조롱하지 않고도 향유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도록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런 무지는 계속돼선 안 된다.” 쏟아진 악성 댓글(악플)들뿐만 아니라 이를 부채질한 언론 보도들은 샘 오취리의 지적이 맞다는 걸 증명한다.

누구나 ‘의도 없이’ 차별할 수 있다. ‘의도’를 가지려면 적어도 그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무지’는 때로 ‘의도’보다 고약하다. 농담일 땐 더 그렇다. 문제제기한 사람이 욕먹는다. ‘네 피해의식이야.’ 성희롱을 지적한 사람들이 많이 듣는 말이기도 하다. ‘의도하지 않은’ 농담들은 차별을 일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얼굴을 검게 칠하는 ‘블랙페이스’는 흑인을 향한 인종주의적 표현이다. 동의하건 하지 않건 그렇다. 의도하건 안 하건 폭력은 폭력이고 차별은 차별이다. ‘학생들의 악의 없는 행동을 빌미로 한국을 인종차별에 무지한 나라로 몰아갔다’고들 하는데, 무지하지 않으면서 의도적이지 않을 수는 없다.

“너무 오냐오냐했지 우리가?” “다른 나라 가면 공장에서 돈이나 벌지 모르지만 한국 와서 좀 뜨니 훈계질을 하고 있다.” 샘 오취리의 방송출연을 금지해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엔 이렇게 쓰여 있다. “대한민국에서 먹여주고 배 불려준 한 외국인 방송인의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 동등한 인간에게 이런 말들을 쓰지 않는다. 샘 오취리는 한국의 시혜가 아니라 자신의 노동으로 살았다. 이 글들은 스스로 자신의 인종주의를 폭로한다. 그것도 출신 국가 국내총생산(GDP)에 따라 촘촘히 나눠 차별하는 한국식 인종주의다. ‘훈계질 할 자격’은 기득권에게만 주어지고,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입을 닫거나 문제제기할 때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대체로 더 살만한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은 ‘가르칠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대한민국만큼 인종차별이 없는 나라는 없다.” “지금 가장 인종차별을 심하게 겪는 인종은 황인이잖아.” 샘 오취리의 포스팅이 한국을 인종차별 국가로 매도해 국격을 떨어뜨렸다고들 하는데, 한국은 오래전부터 인종주의적인 나라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2007년부터 수차례 한국 정부에 시정을 권고했다. 네팔인 산업연수생들이 몸에 쇠사슬을 두르고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외친 게 1995년이다. 산업연수생 제도가 고용허가제로 바뀐 뒤, 지금도 그 구호는 여전하다. 고용자의 허가 없이 사업장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 없다. 최근 민주노총이 이주노동자 655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에서 절반은 주 52시간 넘게 일하고 10명 중 3명은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다고 답했다. 지난 3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조사를 보면, 이주민 10명 중 7명은 한국에 인종차별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먹는 밥, 사는 집, 입는 옷 그 모든 일상에 인종주의적 착취가 배어 있다. ‘우리는 인종주의의 피해자’라는 데 매몰되면 가해자인 자신을 보지 못한다. 피해자인 가해자가 때론 더 지독하다. 피해자라서 가해자가 될 가능성에 대한 일말의 자기검열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으니까.국격이란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이를 떨어뜨린 건 샘 오취리가 아니라 그에게 쏟아진 인종주의적 비난이다.

김소민 ㅣ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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