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말이 사회에는 주는 영향 때문이다. 샘 오취리가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무지가 계속될 수 없다”고 호소한 것은 악의 없는 행동에 대한 가장 원칙적이고 적절한 대응이었다.
홍성수 ㅣ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대한민국”이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사과하는 샘 오취리. 그 사진을 본 순간 정말이지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고개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 학생들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관짝소년단 패러디 사진을 찍었고, 샘 오취리는 ‘흑인 입장에서 불쾌한 행동이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블랙페이스라는 문제에는 여러 가지 논점이 숨어 있다. 블랙페이스가 금기로 되어 있는 것은 단순히 흑인 흉내를 내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얼굴을 검게 칠하는 행위가 전형적인 흑인 비하로 간주되었고 블랙페이스 철폐가 인종차별 반대를 상징했던, 미국의 역사적인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의 맥락이 미국 내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국경을 초월해서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한국의 학생이 블랙페이스의 역사적 맥락을 잘 모르고 한 악의 없는 행동이라는 점도 고려되어야 하지만, 세계 각국의 문화가 국경을 넘어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에서는 문제 될 게 없다’고 강변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가 갖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이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만큼은 전혀 문제 될 수 없고 오히려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샘 오취리가 “기회가 되면 한번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을 건넨 것은 무척 의미 있는 것이었다.
다만 몇 가지 논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예를 들어, 얼굴을 하얗게 칠하는 것도 안 되냐는 반문이나, 비하 의도가 없으니 문제 될 게 없다는 주장 같은 것들이다. 문제의 핵심은 의도가 아니라 ‘효과’다. 소수자를 비하하는 발언,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표현 자체 또는 발화자의 의도 때문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말이 사회에는 주는 영향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이 놓인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똑같은 말이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간한 ‘혐오표현 리포트’(2019)에는 혐오표현의 개념을 정의할 때 “차별을 정당화·조장·강화하는 효과”라는 구절이 굳이 추가되어 있다. 모욕하거나 비난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차별의 효과’를 발생시키는지가 핵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한 취지다. 이러한 개념 정의에 따르면 다른 색깔이 아니라 유독 검게 칠하는 행위를 문제 삼는지가 쉽게 이해된다. 또한 이 리포트에 따르면 ‘의도’는 혐오표현의 개념 요소는 아니라고 확인하면서도, ‘대응 방법’을 선택할 때는 의도가 고려될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악의적 의도가 없는 행위라면 발화자를 비난하거나 징벌하는 것보다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재발을 막는 교육이나 의식 개선을 위한 조처를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 뜻이다. 샘 오취리가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무지가 계속될 수 없다”고 호소한 것은 악의 없는 행동에 대한 가장 원칙적이고 적절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의미 있는 논점을 담고 있는 생산적인 논의는 어느 순간 엉망진창이 되었다. 언론의 영향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한편에서는 이 논란을 있는 그대로 중계방송하듯이 보도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샘 오취리에 대한 비난 기사를 쏟아냈다. 그리고 늘 그러했듯이 클릭을 유도하는 선정적 제목의 보도들이 줄을 이었고, 그런 기사들이 각종 포털과 에스엔에스(SNS)에서 집중적으로 부각되었다. 그 ‘악의적 잘못’은 학생들이나 오취리가 아니라 언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취리가 공개 사과까지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것은 이러한 기사들이 영향력 있는 여론을 형성했기 때문일 테다. 물론 인종차별 논란에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차분하게 지적한 인상적인 기사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계속 반복되는 이 문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종이신문을 꼼꼼히 읽거나 좋은 기사를 일부러 찾아 읽는 독자는 더는 ‘표준 독자’가 아니다. 일부 언론의 일부 기사가 포털이나 에스엔에스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여론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알고 보면 좋은 기사도 많았다’는 외침은 이제 공허해 보인다. 한국의 담론 구조를 바꿔야 한다면 이 현실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