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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하종강 칼럼] 끊임없이 탄생하는 ‘조직부장’들…

등록 2020-08-18 16:01수정 2020-08-19 14:11

인간이 노예가 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한, 체육인들과 종교인들과 무수히 새롭게 탄생하는 플랫폼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부장과 같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종강 ㅣ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천신만고 끝에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몇개 조항밖에 안 되는 단체협약을 체결하기까지는 더욱 힘들었다. 노동조합 사무실과 전화기 등을 제공받았을 뿐이지만 회사가 노동조합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상징이어서 감격적인 승리였다. 하루빨리 직원들에게 노동조합의 성과물을 보여줘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노동조합은 미처 꽃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노동조합 창립 기념 체육대회를 개최하기로 회사와 어렵사리 합의했다. 그 회사 노동자들이 하루 일하지 않고 다른 행사를 해보기는 회사 설립 이래 처음이었다.

체육대회 날 노조 간부들은 준비를 위해 꼭두새벽에 모였다. 조직부장이 “노동조합만이 살 길이다!”라고 큼지막하게 글씨가 적힌 펼침막을 들고 미루나무 위에 올라갔다. 한쪽 끝을 단단히 붙들어 매려는 순간, 딛고 있던 가지가 우두둑 부러지면서 조직부장의 커다란 몸집이 미루나무 밑으로 맥없이 툭 떨어졌다.

동료들이 비명을 듣고 달려갔다. 조직부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씩 웃고 일어나다가 왼쪽 다리가 푹 꺾이면서 다시 쓰러졌다. 무릎 아래 정강이뼈가 골절돼 마치 장작개비처럼 살을 비죽 밀어내며 튀어나와 있었다. 위원장이 놀라서 다른 간부에게 소리쳤다. “빨리 119에 전화해!”

그 말을 들은 조직부장은 드러누운 채 손을 내저었다. “위원장님, 안 됩니다. 구급차 절대로 부르지 마십시오.” 위원장이 “무슨 소리야?”라고 되묻자 조직부장이 말했다. “노동조합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구급차가 요란하게 사이렌 울리면서 와보십시오. 제가 다쳤다고 소문나면 그동안 노동조합 미워했던 놈들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제발 소문 안 나게 처리해주세요.” 고통 때문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조직부장은 계속 “구급차 절대로 부르지 말라”고 애원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간부의 승용차를 이용해 조직부장을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병문안을 온 동료들에게 사고 현장을 직접 목격한 간부가 사고 경위를 설명하면서 말했다. “이순신 장군이 따로 없었다니까…. ‘동지들, 나의 부상을 적에게 알리지 마시오!’ 와,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살아난 모습이었다니까….”

꽤 오래전 일이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옛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낸 이유는 이런 노동자들이 요즘도 끊임없이 계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인권’에 대해 처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는 체육인들을 몇차례 만났다. 장대비가 퍼붓는 날 했던 작은 모임은 올림픽 출전 경력을 가진 선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혹시 사진을 찍더라도 우리 모습이 사진에 나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했다. 자신들이 그날 그 자리에 온 것을 비밀에 부쳐달라고 했다. “15년 넘게 스포츠 지도사로 일했지만 그동안 4대 보험을 적용받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시청 소속 대표 선수들조차 4대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1년 계약직인 코치·감독도 파리 목숨이기는 마찬가지여서 그 기간 안에 실적을 올리느라고 선수들을 혹독하게 다그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체육인 출신 대학원생은 “운동선수로 하여금 최대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스포츠심리학의 전부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상처받은 체육인을 치유하는 스포츠심리학이 정말 필요하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라고 말하며 목이 메기도 했다. 솔직히 나로서는 지금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 많았다. 은퇴할 나이에 가까워지는데 할 일이 점점 많아진다는 중압감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기독교 기관에 고용된 목회자를 비롯한 피고용자들의 노동조합을 준비하고 있는 목회자와 몇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 한번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몇번의 전화 통화만으로도 ‘동지’처럼 느껴지는 관계가 됐다. 상급단체를 민주노총으로 선택하는 문제와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그동안 같이 준비해왔던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으로 고민이 많았다. 상급단체 결정을 뒤로 미뤘다고 비난받는 목회자나, ‘배신당했다’며 떠난 활동가나 모두 내가 보기에는 앞 이야기에 나오는 조직부장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다.

인간이 노예가 될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한, 체육인들과 종교인들과 무수히 새롭게 탄생하는 플랫폼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부장과 같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많은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더 많은 노동자가 가입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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