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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진순 칼럼] 대전환의 시대, 새로운 진보의 출현

등록 2020-08-04 14:44수정 2020-08-05 13:44

빙벽이 쪼개져 나가는 것에서 상실의 고통을 느끼는 데 머무른다면 새롭게 떠오르는 빙산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기존의 질서를 찢고 나오는 새로운 빙산의 등장, 그들은 이 시대 사회적 약자의 보편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진보의 주체세력이다. 수많은 결별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각변동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진순 ㅣ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모든 결별은 쓰리고 아프다. 오랜 벗들과의 결별은 더욱 그렇다. 지난 몇 달간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커다란 빙벽이 쪼개지듯 깊은 인연에 균열과 박리가 일어났다. 조국과 윤미향과 박원순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몸으로 받아내면서라도 본진을 수호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으로 불탄다. ‘보수언론과 다를 바 없는 논리라서’ ‘그분들이 해 온 일, 하려고 하는 일의 역사적 의미를 부정하는 일이라서’ 수호론자들은 비판을 이단시하고 음모론과 시기상조론을 외친다. 좁은 우물에서 메아리는 증폭되지만 우물 밖 세상은 다르다.

박원순의 죽음은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정치인으로서의 평가는 유보하더라도, 적어도 인권변호사로서 시민운동가로서 서울시장으로서 그가 추구해 온 가치와 행보가 시대변화에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그의 공이 그의 과를 묵인하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박정희의 경제성장이 그 혼자만의 업적이 아니듯, 설사 박정희의 공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신독재의 과를 덮지 못하듯, 공과논쟁은 역사적 평가를 유치하고 저열한 산술식으로 전락시킨다. 나는 박원순의 비극적 퇴장을 접하며, 한 시대의 종말을 본다.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연일 벌어지는 논쟁은 진보의 분화와 새로운 진보의 출현을 가시화한다.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일은 혼돈스럽고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게 일군 민주주의의 성과를 배신하는 일이 아니다. 누구도 민주주의의 성과를 독점하거나 사유화해선 안 된다. 지금은 ‘개와 늑대의 시간’이 아니다. 이미 새로운 가치가 등장해서 기존의 가치를 밀어내는 중이다. 빙벽이 쪼개져 나가는 것에서 상실의 고통을 느끼는 데 머무른다면 새롭게 떠오르는 빙산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된다. 빙산의 일부만 돌출되어 있을 뿐 더 큰 몸뚱이가 수면 아래 있다. 촛불항쟁으로 태동된 새로운 민주주의 감수성, 인권과 공정과 정의의 문법이 빙산의 핵심이다. 나는 이 새로운 진보에게서 민주주의 감수성을 다시 배운다.

새로운 진보는 정의를 정략화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폭력정권을 몰아내는 것이 급선무였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장 상위의 가치에 놓고 ‘큰 대’자를 붙여 ‘대의’라 불렀다. 위계와 비밀주의, 젠더 차별과 성폭력과 같은 ‘소소한’ 문제들은 대의의 전략적 중요성 아래 있었다. 딱 그만큼까지가 80년대 세대가 몸에 익힌 민주주의이다. 87년 이후의 세대에게 정의와 인권은 인물에 따라 사안에 따라 경중을 달리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평등하다’란 것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시장이나 평범한 직장인이나 그 삶의 존엄의 무게는 똑같이 100조원이다. 전략적 대의를 위해 또 다른 정의와 인권을 차출해도 용인되던 시대는 지났다.

새로운 진보는 ‘인연’과 ‘의리’의 그물망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중장년층 지식인들이 ‘함께해 온 동지’로서 애틋한 인연과 신의에 묶여 머뭇거릴 때, 새로운 진보는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사적인 인연과 친분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오는 것은 이들에겐 ‘부당내부거래’에 해당한다. “몇십 년 세월을 다 얘기할 수 없고 나는 의리와 신의를 지키고 그분을 존경했다”라고 말한 최순실의 의리론이나 이른바 진보 인사들이 말하는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쌓인 신의와 우정’은, 새로운 진보에겐 똑같은 구태일 뿐이다.

새로운 진보에겐 절대적 내 편과 네 편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서초동 집회와 광화문 집회 어느 쪽에 섰느냐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에 분개한다. “조국 장관 임명에 반대하지만 공수처를 지지할 수도 있고, 공수처에 반대하지만 검찰개혁에 찬성할 수도 있는데” 왜 서초동 대 광화문, 민주당 대 통합당의 이분법으로만 사람을 재단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불안정노동과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습이 구조화된 사회에서, 소득과 직업, 성별, 지역, 학력, 국적 모든 부분에 걸쳐 사회적 약자가 중층적으로 존재한다. 새로운 진보에게 중요한 것은 권력적 상하관계이지, 정파적 좌우관계가 아니다.

진보의 시침은 늘 변화한다. 약자의 편에 선 이, 불편한 진실을 고발하고 현상유지의 관성을 깨는 이가 진보이다. 기존의 질서를 찢고 나오는 새로운 빙산의 등장, 그들은 아직 정치적으로 호명되지 않았을 뿐 이 시대 사회적 약자의 보편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새로운 진보의 주체세력이다. 수많은 결별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각변동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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