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 아픔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픔들끼리 서로 물어뜯으며 또 다른 아픔을 만들어낼지, 아니면 그 아픔들이 함께 진정한 아픔들의 적과 맞서 싸울지 말입니다. 아픔들의 연대만이 또 다른 아픔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말처럼 공동체의 유일한 통일성은 서로에 대한 ‘연민’이 되어야 합니다.
신영전 ㅣ 한양대 의대 교수
‘아픔’은 없습니다. ‘아픔들’이 있을 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말처럼 태평스러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에선 서글픈 소리가 납니다. 그렇기에 아픔은 단수가 아니라, 늘 복수인 ‘아픔들’입니다. ‘인권’이 복수인 것처럼.
아픔은 다른 아픔에서 온 것입니다. 한 연쇄살인범 청년은 어린 시절 집이 너무 가난하여 크레파스조차 챙겨 갈 수 없었는데, 담임선생님은 그런 그를 친구들 앞에서 모욕하고 수업시간 내내 복도에서 알몸으로 벌을 세웠고 그 아픔과 수치심이 지금의 자기를 만들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 아픔은 그에게 가족을 잃은 많은 이의 아픔으로 이어졌습니다.
아픔들은 한 가족입니다. 권력 앞에 수치심을 느껴야 했던 한 여인의 아픔도, 그녀에게 아픔을 가한 이의 자살이 가져온 아픔도 실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손끝에 박힌 가시가 만들어내는 아픔도, “재 가운데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는 고통”도 모두 한 가족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것은 ‘내 아픔’이기에 아픔 간에 경중을 매기는 일은 소용없을 때가 많습니다.
아픔의 적은 아픔이 아닙니다. 아픔의 적은 ‘무감각’입니다. 권력이 있으면 약한 이들을 능욕해도 된다는 마초성과 약한 나라는 침략해도 된다는 제국주의의 근저에도 무감각이 있습니다. 며칠 전 머나먼 타국에 와서 동생 교육비를 벌던 이주노동자 제프리가 안전관리자도 없이 고장 난 기계를 고치다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었습니다. 이런 사고가 몇십년째 반복되는 것은 돈이나 과학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바로 아픔에 무감각하기 때문입니다. 평화보다 전쟁 무기 팔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 “꽃상여/ 고샅 돌아 산길 오르기도 전에” 보궐선거 주판알을 굴리기 바쁜 이들, 코로나19로 고통받을 때 그 아픔을 이용해 ‘규제 샌드박스’ ‘규제자유특구’ ‘바이오 헬스’ ‘뉴딜’이니 하며 각종 안전장치를 풀어 영리를 취하려는 자들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안전장치를 꺼 수많은 ‘제프리’의 아픔을 만들어낸 이들과 같은 이들입니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철학자 니체는 지금까지 인류에게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라 설파했습니다. 아픔을 모르는 이에겐 지옥의 불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자리는 지옥의 가장 밑바닥 얼어붙은 코키토스 호수보다 더 깊은 곳입니다.
아픔에 대해 인류가 배운 교훈은 술과 진통제로도 아픔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 다시 돌아가고 싶어”를 외쳐도 우리는 다시 그 아픔을 만들어낸 시간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데 다른 아픈 이들의 보듬음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한 여인의 아픔을 그저 상처만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아픔이 길이 되고 힘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픔들의 연대가 필요하고, 지금 거기엔 ‘가이사의 법칙’이 필요합니다. 로마 총독 가이사의 몫은 가이사에게, 하늘의 몫은 하늘에 주는 법칙 말입니다.
아픔은 힘이 셉니다. 이 세상의 모든 고귀함은 아픔들이 만든 겁니다. “고통 없이 의식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아픔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의 힘은 다른 이들을 쉽게 다치게도 합니다. 죽은 이에 대한 애도는 피해자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지만, 그가 누구든 한 사람의 죽음을 아파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가해가 “될 수 있는 것”과 “아닌 것” 사이의 긴장 관계를 힘겹게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이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아닐는지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두지 못하는 저 같은 “한남(한국 남자)에겐 희망이 없다. 잠시라도 좀 가만히 있어라”라는 말은 맞지만, 안타깝고 억울하게도 그 말은 “여자는, 흑인은 조용히 해”라는 말과 친척입니다. ‘피해자 우선 보호’ ‘진상규명’ ‘인식론의 사각지대에 대한 비판적 성찰’ ‘지속적인 성평등 교육’ 등이 시급하지만, 아픔이 ‘다른 아픔’을 밀어내는 것이 동력이 되어서는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무엇보다 아픔은 인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늘 그 아픔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아픔들끼리 서로 물어뜯으며 또 다른 아픔을 만들어낼지, 아니면 그 아픔들이 함께 진정한 아픔들의 적과 맞서 싸울지 말입니다. 아픔들의 연대만이 또 다른 아픔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말처럼 공동체의 유일한 통일성은 서로에 대한 ‘연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 ‘아픔’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