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택 ㅣ 여론팀장
미국에선 칼럼니스트들을 ‘데드라인 아티스트’(deadline artist)로 호칭하는 이들이 있다. 활자매체의 좋은 칼럼을 선별해 책으로 엮어낸 언론인들이다. 칼럼니스트와 기자를 주인공 삼은 다큐멘터리 제목도 있다. 선택된 이들에겐 영광일 법하다.
옮겨 말하자면 ‘마감 예술가’. 예술은 나와 내가 모르던 또 다른 나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고, 나라는 이들과 세계의 맥락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훌륭히 활자화된 칼럼이 어지간한 소설이나 시나 미술, 가령 조영남씨의 화투 그림과도 비교 못 할 건 아니다.
200자 원고지 기준 10장, 15장 안팎의 원고를 마감하기 위해 헌신하는 여러 칼럼니스트들을 알고 있고, 여론팀장 직함으로 그 ‘예술가들’의 글을 (아마도) 첫번째 독자로서 읽는 호사를 최근 누리고 있다.
“헌신”이라 이를 만한 이유들이 있다. 자신부터 만족시키는 글쓰기를 첫 허들이자 마지막 결승점 삼아, 상투적이거나 비논리적일 수 있는 자신과 전투를 치르듯 대면하는 이들을 보고 들을 때마다 첫 문장부터 마감까지는 옹근 지옥이라고밖에 묘사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실제 관록의 한 칼럼니스트는 한달 주기의 마감보다 차라리 매주 쳐들어오는 마감이 낫다면서 “다달이 마감은 한달을 내내 지옥으로 만든다”고 했다. 마감 뒤 한나절이라도 숨 돌릴 기회가 있다 치면, 다달 마감은 그 틈이 달에 한번뿐이고 주 단위 마감은 그래도 매달 너덧차례는 될 터라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어떤 셈법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기어코 한달을 통째 지옥으로 삼고, 조정래 선생의 말마따나 “글감옥”에 가두는 필자 스스로의 태도다.
마감은 말하자면 형벌이다. 지난 몇달 오피니언 개편을 준비하며,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매달린 적이 있다. 며칠 뒤 작가가 전해준 답변은 “마감 등이 수반되는 연재집필 의뢰는 수락하고 있지 않습니다”였다. 거절의 완곡한 표현이겠으나, 세계적인 이야기꾼에게도 마감은 달게 받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대개 그렇게 저마다 구형해놓은 마감의 형벌을 감당하여 독자청중에게 소개되는 <한겨레> 기명 칼럼이 하루 많게는 10꼭지가 넘고 주마다 50꼭지는 된다. 중편소설 한편의 분량인 셈이다.
최근 전통의 출판사인 까치글방의 창립자 박종만 선생이 별세했다. 그가 유가족에게 남겼다는 “다른 문화장르처럼 책 문화가 대중화하지 않아 안타깝다”는 말은 슬펐고 조금 화가 났다. 책 문화가 결국 활자로 우거지고 방창하는 숲이라면 그 속엔 한강의 소설도, 백석의 시도 있고, 김훈의 ‘거리의 칼럼’도 있으며, 홍은전의, 서한나의 칼럼도 있게 마련이다. 트로트와 엘피판이 돌아와 부흥하는 2020년, 그러나 오직 활자만은 저 혼자 고루한 채 변할 줄 모른다고 타박받고 외면을 받는다, 고 나는 느낀다.
박종만 선생에 이어, 2014년부터 <한겨레>에 칼럼을 연재해오던 생태운동가 김종철 선생이 지난달 25일 생을 마감했다. 그는 닷새 앞서 “최근에 제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 제가 맘 편하자고, 한겨레에 번거로움을 끼쳐드리는 것 같아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부디 저의 청을 받아들여 다른 필자를 선정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많이 부족한 사람에게 지면을 제공해주신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합니다”라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왔다. 마감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필자 교체를 거듭 당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주 두분의 칼럼니스트가 고인을 언급했다. 김종철 선생의 마지막 신문 칼럼(
‘코로나 환란, 기로에 선 문명’)을 인용한
부부 건축가(임형남·노은주)와, 그분의 서적(<대지의 상상력>)을 되짚은
정홍수 평론가의 글엔 문장뿐만 아니라 태도나 자세 같은 것들이 깃들어 있었다. 말하자면 “이 지면에 어쭙잖은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나에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입장과 언어가 있는가 하는 자문이었다. 날 선 목소리의 회피를, 나 자신을 조금은 덜 속이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던 지점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내가 나 자신에게 썼던 속임수는 남는다”는 고백(정홍수).
그 무게를 감당하며 하나의 칼럼이 마감되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그 글들이 그 많은 예술만큼 소비되지 않는 시대, 한줄이라도 한명이라도 더 호명할 수 없을까 궁리 끝에 ‘칼럼 읽는 남자’, 줄여 ‘칼람’을 시작해본다.
익히 목도하고 있듯, 김종철 선생이 이미 마감한 글은 앞으로도 누군가의 글로 마감될 것이므로 그 마감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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