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만명의 일자리를 하룻밤 새 없애버린 경제위기는 기술변화 때문이 아니다. 지난번 세계적 일자리 위기의 근원은 금융이고 불평등이었다는데, 이를 고쳤다는 소식은 없다.
결국 경제 시스템의 문제이고, 우리가 선택한 정책과 제도의 문제였다. 그런데 인공지능 소식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기술혁명 시대에 걸맞은 파격적인 기업 지원과 규제개혁을 주장하거나, 신기술에 노동자가 빨리 적응하도록 교육과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은근히 노동자에게 힘겨운 책임을 넘기기에 바쁘다.
이상헌 ㅣ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인공지능에 앞서 인공두뇌(cybernetics)가 있었다. 1940년대에 이 말을 만든 사람이 노버트 위너다. 어릴 적부터 명성이 자자했던 천재 수학자였던 그는 2차 세계대전 중에 상대 전투기를 자동적으로 겨냥해서 발포하는 일종의 자동 대공방어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인공두뇌 분야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가 늘 끼고 다니던 동그란 안경 뒤에는 천재적 광기가 번쩍거렸다.
위너의 정치사회적 감수성도 유별났다. 자신의 연구가 인간사회에 미칠 영향에 민감했다. 군사적으로 엄청난 발견을 하고서도 그것이 냉전에 사용되지 않길 바랐고, 원자력 기술에 대한 걱정도 컸다. 자신이 홀로 개척한 인공두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인공두뇌 덕분에 자동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겠지만, 그 때문에 일자리가 파괴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인공두뇌에 기초한 새로운 산업혁명은 “양날의 칼”이라고 했다.
자신의 발명에 세상이 열광할수록 수학자의 근심은 커졌다. 그때가 1950년대 초반이었으니, 1930년대 대공황 동안 겪었던 대규모 실업이 수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생생할 때였다. ‘실업’이라는 말만 나와도 ‘어려운 시절’의 상처가 다시 살아났다. 위너는 이런 상황에서 실로 ‘어마무시’한 폭탄 발언을 한다. “오늘날의 자동화는 (…) 1930년대 대공황을 ‘유쾌한 농담’ 정도로 만들 정도의 심각한 실업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연이어 행동도 뒤따랐다. 노조와 기업에 공개서한을 보내어 이 문제를 같이 논의하자고 촉구했다.
‘자동화’라는 말이 만들어지고 기술변화로 인한 실업에 대한 염려가 있었지만 전쟁 후에 일자리가 늘어나는 상황이라서 내심 안도하는 분위기였던지라, 위너의 경고는 엄청난 파장을 가져왔다. 논쟁을 피할 수 없었다. 1957년에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결론은 한마디로 “걱정은 이해하지만 지나치다”는 것. 미국에서도 최근 몇년간 일자리가 25% 이상 늘어났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계속되었다. 미국에서는 1963년 저명한 과학자와 경제학자들이 위원회를 결성하여 인공두뇌 혁명에 따른 대량실업을 경고하면서 그 대안으로 모든 시민들에게 적정소득을 보장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일종의 보편적 기본소득론이었다. 전문가의 강도 높은 경고에 존슨 대통령도 신속하게 반응하여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경고가 무색할 만큼 1960년대 일자리 사정은 적어도 양적으로는 건실해서 인플레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마저 나오는 상황이었다. 대통령 위원회의 일은 다소 두리뭉실한 보고서로 마감되었는데, 논쟁에 대한 총평은 “사실보다는 의견이 앞선 논쟁”이었다.
논쟁은 다시 돌아왔다. 1980년대에 컴퓨터가 대량보급되면서 ‘기술적 실업’에 대한 염려가 커졌다. 정보기술을 앞세운 3차 산업혁명이 기존의 좋은 일자리를 없앨 것이며, ‘생각하는 기계’까지 탄생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일자리의 숨 쉴 공간도 없앨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제러미 리프킨의 책 <노동의 종말>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거세었던 이런 정서를 대변한다. 그가 내세운 대안은 자발적인 공동체 기반 조직, 이른바 ‘제3의 섹터’였다. 국제노동기구도 다시 이 문제를 다루었고, 결론은 다시 한번 ‘증거 없음’이었다. 땀내 나는 ‘노동’은 건재했다.
친숙한 논쟁은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4차 산업혁명이었다. 인공지능을 앞세운 산업혁명이었고, 그 영향은 역사상 전례를 찾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실업의 쓰나미’를 경고하는 말도 뒤따랐다. 컴퓨터 혁명 덕분에 ‘전문가’들 간의 수치 경쟁도 치열해서 누구는 30%, 어느 누구는 50% 정도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런 경고는 순식간에 퍼졌다. 게다가 세계 경제는 2008~2009년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었으나, 일자리 회복은 아직 오리무중인 상황이었다. 실업의 기억 때문에 대중적 공포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세계경제포럼(WEF)이 나서서 목소리를 모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목소리가 옅어졌고, ‘전문가’들도 기술변화만 놓고 본다면 ‘실업의 쓰나미’는 생기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오늘날 전례 없는 대규모 실업은 신기술이 아니라 코로나바이러스에서 오고 있다.
기술변화는 일터의 변화무쌍한 현실이었지만 이 둘의 관계를 따지는 논의는 놀라울 정도로 변하지 않는다. 시작과 결론 모두 친숙한 데자뷔다. ‘혁명’을 내세운 충격어법으로 시작하지만 정작 분석은 충격적일 정도로 일면적이고 결론은 파격적이다. 기술변화가 없애는 일자리에만 관심이 쏠리다 보니, 그로 인해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를 꼼꼼하게 따지지 않는다. 컴퓨터가 없애버린 단순행정직이나 단순조립직은 크게 보지만, 컴퓨터 제작을 위해 필요한 새로운 인력 수요를 보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도 한다. 지난 100년 동안 일자리 부족 문제가 어찌 기술변화만의 문제였던가. 수백만명의 일자리를 하룻밤 새 없애버린 경제위기는 기술변화 때문이 아니다. 지난번 세계적 일자리 위기의 근원은 금융이고 불평등이었다는데, 이를 고쳤다는 소식은 없다. 결국 경제 시스템의 문제이고, 우리가 선택한 정책과 제도의 문제였다. 그런데 인공지능 소식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기술혁명 시대에 걸맞은 파격적인 기업 지원과 규제개혁을 주장하거나, 신기술에 노동자가 빨리 적응하도록 교육과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면서 은근히 노동자에게 힘겨운 책임을 넘기기에 바쁘다. 물론 혁신과 훈련이 모두 필요한 일이지만 핵심은 빼두고 변죽만 울려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일자리 숫자만 따지다 보니 일자리의 질을 보지 못한다. 예컨대 컴퓨터 시대의 문제는 대량실업이 아니라 좋은 중간층 일자리의 상실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문제는 일자리의 ‘소멸’이 아니라 플랫폼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이다. 또 그렇게 형성된 새로운 부가 나누어지는 방식의 문제다. 현란한 신기술이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그 현란함 때문에 그늘진 곳을 살펴야 한다.
인공지능 개척자의 고용 예측은 틀렸다. 하지만 위너의 고민 방향은 날카롭고도 옳았다. 그는 자신의 최첨단 기술이 이윤추구 수단이나 “황금 송아지”로 숭배되지 않고 인간의 여유로운 삶을 확장하는 데 사용되길 바랐다. 인간을 인공두뇌와 경쟁하게 내버려두면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된다고 우려했다. 그 걱정을 대량실업으로 표현한 것이 그의 실수였다. 그의 책 제목은 <인간을 인간적으로>(The Human Use of Human Beings.)다.